소녀에게
오늘의 시 한 편 (86).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엽서
소녀에게
장이지
지난해 당신이 주고 간 도토리들은
상수리나무가 되는 대신 노래가 되었습니다
손바닥에 쥐고 있으면
바람이 달려와 먼 곳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당신은 눈이 쑥 들어간 할머니가 되어서는
하늘도 땅도 없는
어둠 속에 혼자 있다고
팔월의 하늘에는 푸름이 떠돌고 있습니다
고추잠자리가 그 위로 날아다니며
여름 해의 은실을 모으고요
나무들은 문제없습니다
그늘에 새로운 이끼들을 키우고 있습니다
당신이 주고 간 도토리 속에서는
달이 다이아몬드로 굳어가고
별들이 오팔처럼 그윽해지다가 그대로 오팔이 됩니다
밤의 새들은 빈 들판의 돌이 되어 잠들고
아침이 되면 참새가 되어 몰려다닙니다
저는 당신을 기다릴 겁니다
할머니가 된 당신이어도 좋아요
이 존재의 축제 속에서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바람이 달려와 먼 곳의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바람이 전해 준 긴 편지를 읽는 느낌입니다. 도토리들이 노래가 되고, 소녀가 할머니가 될 때까지의 이야기들을 바람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겁니다. ‘여름 해의 은실을 모은다는 고추잠자리’ 정말 멋진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덜컥, 이 문장을 고를까 하다가 이 모든 것들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바람이 주체가 아닐까 싶어서 살짝 밀쳐두었습니다만, 구름 뒤에서 빗살로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가끔 봅니다. 그것들을 “은실”이라고 표현했을지 짐작해 봅니다. 달도 별도 새도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축제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귀하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