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
오늘의 시 한 편 (85).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시간을 공처럼 굴리며
김해자
책상 앞에 꼿꼿이 앉아 있는
딸아이 시선이 먼 데 가 있다
아직도 근무 중인가 독서대에 세워진 책을 투과하여
벽을 째려보는 것 같다
열린 문틈으로 가만히 들여다봐도
서울에서 온 달마는 미동도 없다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가 물을 개의치 않듯
공중을 날아다니는 새가 허공을 문제 삼지 않듯
한국사와 동아시아사와 세계사를 편집하고 교정하고, 문
제를 만드는 선생들과 상사와 상사의 상사에 둘러싸여, 이
미 나왔던 문제와 아직 안 나온 문제, 적당히 풀지 못할 역사
의 문제와 문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던 딸은 시방 면벽
(面壁) 수행 중, 무한대 (∞)를 눕혀놓은 듯한 8년 8개월, 문제
만 만들다 어느 날 갑자기 문제를 때려치웠다
텅 빈 벽,
벽관(壁觀)을 마친 달마가 벽을 향해 모로 누웠다
이불에 친친 감긴 그는 와선 중
방문 반쯤 열어두고 창문도 활짝 열어둔 채
지붕 아래선 갓 깨어난 참새 새끼 삐악대는 소리
꾸욱꾸욱 방점 찍어 산비둘기 울고 간 뒤
새끼 없는 뻐꾹새도 이따금씩 울어대는데
아무 소리가 없다 시계를 벗어던진 딸아이는
아무래도 나보다 한 수 위
시간을 공처럼 굴리며 노시는가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시간을 공처럼 굴리며
(시간을 관장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보다 ‘한 수 위’가 아닐지. 시속 화자의 딸아이는 아마도 수능시험 출제자가 아닐지 짐작해 본다. 문제 풀기가 쉬워도 어려워도 이미 나온 문제도 이런저런 문제들을 모두 제하면 무엇을 또 문제로 만들어야 하냐며 머리를 싸매다가 아예 팽개쳐버리다가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모양이다.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학생들만 힘든 게 아니었다. 문제를 만드는 사람들의 고민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문제를 만드는 사람’ 어감이 좀 그렇다. 시속에서는 그런 뜻이 아니지만, 나는 주로 신이 내 생에 제시한 문제를 푸는 사람이라서 ‘문제를 만드는 사람’이 운명적으로 신적 존재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