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
오늘의 시 한 편 (84).
매일 시 한 편씩 올리다 보면, 금방 한 권의 책을 읽게 되겠지요?
첫 번째 책은 "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창비-2024)입니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황유원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그 풀이 뚝, 뚝
끊기는 소리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왼손으로 피아노를 치던 피아니스트의 굽은 오른손은
불어오는 바람에 서서히 펴져
나무처럼 자라오른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이제는 한가한 게 어떤 건지도 잘
모르게 된 나는
저 양들을 보며 비로소 무언갈 깨달아간다
양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연주는 얼마나 놀라운가
풀 한포기 없는 방을 풀밭으로 만들어놓고
천장을 본 적 없는 하늘빛으로 물들이는 이 연주는,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을
스르르 잠들게 하는 이 연주는!
음악은 연주와 더불어 잠이 들고
양들도 이젠 다들 풀밭에 무릎 꿇은 채 그만
잠이 들어
풀 뜯는 그 모습 더는 보여주지 않지만
나는 이제 한동안 음악 없이도 양들이 한가로이 풀 뜯는
모습
머릿속에 그릴 줄 알게 된다
양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고
나는 그 풀이 된다
* 바흐 「사냥 칸타타」 BWV 208에서.
* 마음을 붙잡은 한 문장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
(삼매경 : 한 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하여 머물게 되는 경지. 이런 시간에는 그랬다. “머릿속을 점령한 채 계속 날뛰는 무가치한 생각들”이 진공상태처럼 내 생각에서 사라지고 없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양들이 풀을 뜯는 한가로운 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잡념이 사라지게 되는가 보다. 자연은 그런 힘이 있는 것 같다. 나무들과 풀을 상대로 무언가를 할 때는 시간의 징검다리를 훌쩍훌쩍 뛰어넘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시간에는 정말 머리를 지끈거리게 하는 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 그렇다면, 시간이 무용한 고민거리를 훌쩍 뛰어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