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추석이라고 해도 농원일은 쉴 수 없었다. 블루베리 화분에 풀을 뽑았고, 복숭아나무 유인작업과 가지치기를 했다. 올해는 어쩐지 긴 연휴에 휴가를 가지 못하고, 일만 했는데도 심적으로 힘들지 않았다. 날씨도 좋았고, 하늘도 높았다. 무엇보다도 밀려 있던 가지치기와 유인작업을 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매일매일 자연스럽게 농장으로 출근했다. 우리를 가다리는 지니가 있어서 빨리 가서 산책도 시켜주고 밥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집에서 뭉그적거리는 시간이 불필요했다. 우리를 보며 방방 뛰어오르는 지니의 꼬리 침에 마음이 환해졌다. 은행나무 아래 평상에서 지니를 보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했다. 며칠 새에 바람이 조금씩 시원해지고 있었다. 바람에 은행알들이 두두둑 떨어지면서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연휴 중간에 둘째가 영화 보러 가자고 해서 평소에 좋아하는 이병헌 배우가 출연하는 "어쩔 수가 없다"라는 영화를 봤다. 울며 웃으며 많은 생각을 하면서 감상했다. 부당해고로 인해 취업을 하고자 우여곡절을 겪으며 취업이 되었는데, 공장은 모두 기계화로 인해 사람 한 명도 없는 삭막한 곳으로 변해 있는 씁쓸한 엔딩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 영화 정말 잘 만든다.
벌초와 성묘 목적으로 고흥에 두 번 다녀왔다. 고흥 여수 간 연륙교를 왕복했고, 여수 낭도에 들러 유명한 젖샘막걸리를 사왔다. "공업적인 맛이 덜하고 전통의 맛이 느껴지며 속이 편하다"라고 옆지기는 평했다. 남열리 해수욕장과 우주전망대, 남포 미술관까지 다녀왔다.
[남열리 해수욕장과 우주전망대]
남열리 해수욕장은 넓은 백사장과 완만한 깊이, 적당한 바람 등으로 서핑 명소이기도 한 고흥군 남열리 해수욕장에 다녀왔다. 맑고 부드러운 물결과 가까운 에메랄드빛과 멀리 짙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명품 해수욕장이다.
"지붕 없는 미술관"인 고흥군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나로우주센터를 볼 수 있는 우주 전망대가 생겨서 7층 전망대 카페에 올라갔는데 인파에 밀려 앉을자리가 없어서 구경만 하고 내려왔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이는 남열 해수욕장과 그림처럼 펼쳐진 섬들이 아름다웠다. 벌써, 나락을 벨 때가 되었는지 벼들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이미 추수를 마친 곳도 보였다. 고흥은 따뜻한 남쪽이라 추수도 내륙보다 빠르다는 것을 알았다. 30여 년 전에 걸어서 오르며 무척 힘들었던 길이었는데 차로 순식간에 올랐다.
두 사람은 저곳에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다. 목만 내놓고 있다. 양쪽에서 그물을 붙잡고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고개를 물속에 넣지도 않고, 손을 위로 올리지도 않고, 장소를 옮기지도 않았다. 나는 모래사장을 걸어 들어가 한참을 조개도 줍고, 바닷물도 만져 보았다. 둘째는 넓은 바다가 무서운지 해송 숲에서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았다.
[남포 미술관]
2005년에 세워진 남포 미술관은 둘째가 초등 1학년 시절에 남포 미술관에서 미술 수업을 받은 적이 있다. 폐교된 영남중학교 교무실에 있는 시계를 좋아했던 둘째가 고흥에 갈 때마다 남포 미술관 이야기를 했었다. 남열리 해수욕장을 가는 길에 남포 미술관에 들렀다.
교무실은 미술관 전시실로 바뀌어서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시계가 없어서 무척이나 서운해했다. 전남의 10대 정원에 뽑혔다는 "하담정"을 관람했다. 수국이 피었을 여름엔 훨씬 더 예뻤을 정원이었다. 대신, 가을꽃들이 예쁘게 장식되어 있었다. 하담정 정자가 티끌하나 없이 깨끗해서 정말 관리가 잘 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에 들렀던 남포 미술관에서는 팔영산의 아름다운 능선이 보였다. 하늘은 넓고 파랬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먼 길을 달려서 미술 수업을 듣게 했던 젊은 엄마였던 때가 생각났다. 나는 아이들의 독서논술을 함께 했었다. 한 엄마는 여행을, 한 엄마는 간식을, 한 엄마는 문화생활 등 각각의 분야를 맡아서 아이들 교육에 열성을 다했던 시절이었다. 둘째가 가고 싶어 했던 그 장소에 나도 가고 싶었었다는 것을 알았다.
언덕 아래 풀숲에 떨어진 은행알을 줍기는 쉽지 않다. 경사와 바위를 딛어야 한다. 풀까지 우거져 있어서 은행알을 찾기도 어렵지만, 흙이 묻거나 으깨진 것도 있기 때문이다. 평상 위로 떨어진 은행알을 줍는 것은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다.
매연에 노출되지 않은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은행나무다. 오염되지 않은 은행이라는 생각에 '이걸 팔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 모든 자연물을 환금의 가치로 생각하는 습관은 농부가 되고 난 후부터다. 수확기가 끝나서 다음 수확기까지 긴축재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 마음까지도 조절하는 것 같다.
풀도 꽃도 개복숭아, 매실, 밤, 대추, 감자, 콩 등 내 손을 거쳐서 나오는 것들을 두고 혼자서 샘을 해보는 것이다. 실천은 하지 못하고, 대부분은 지인들께 선물로 갔다. 올 추석에도 밤을 주워서 선물했는데, 엄청 좋아해 주셔서 덕분에 내가 행복했다. 은행이 익으면 오겠다던 친구한테 연락해야겠다. 깨끗하고 예쁜 은행알을 많이 모아 놓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