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4년 동안 향교 전교(지방문묘를 수호하는 한편, 지역사회의 윤리문화의 창달을 위하여 활동하는 향교의 책임자)셨다. 연임하셨기 때문이다. 오늘 이취임식에서 명예로운 퇴임을 하셨다. 빨간 향교 한복을 입으신 아버지는 식장의 주인공이셨다. 4년 동안의 열정과 노고를 치하하는 말씀들이 이어졌고, 감사패와 공로패까지 네 차례의 수여가 있었다. 사무국장부터 시작해 유도회장을 거쳐 전교까지 20여 년 이어진 향교와의 인연이었다.
내가 아는 아버지는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셨고, 항상 깨어 있는 분이셨다. 주위의 얽힌 문제들을 풀어주는 사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 분쟁을 화합시키는 판관, 강직한 선비셨다. 이취임식의 업적평에서도 향교의 기틀을 갖춘 것은 물론, 유림을 화합하고, 기존 교육기관으로서의 위상을 높였다는 말씀이 대부분이었다.
아버지는 가정생활보다는 바깥활동이 더 많으셨다. 민선 1기 조합장이셨던 아버지는 매사에 빈틈없고, 최선을 다하셨다. 어렸을 때는 집과 떨어진 곳에서 직장생활을 하셨기 때문에 며칠에 한 번씩 집에 오셨다. 아버지는 항상 우리들의 우상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아버지의 아들이나 딸이라는 것은 늘 큰 울타리다.
아버지는 중학교 때, 정종을 사서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고 한다. 장학금을 받아야 해서 학교에서 추천하는 고등학교는 가기 어려우니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학교로 원서를 써달라고 사정하셨다. 담임 선생님은 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그렇게 해주셨다. 전장학생으로 고등학교에 다니던 중에 할아버지가 자취방의 짐들을 모두 빼가셨다고 한다. 종갓집을 누가 지키냐는 것이다. 정작 본인은 농사 한 번 지어보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를 고향으로 끌어내리셨다.
아버지는 늘 바쁘고 부지런하셨다. 현실에 최선을 다하며 모범을 보이셨다.
50대에 운전 면허증을 따신 아버지는 83세인 지금도 가까운 거리는 손수 운전해 다니신다.
60대에는 컴퓨터 교육을 받으셔서 향교의 서류들도 컴퓨터를 활용해서 직접 작성하셨다.
70대에는 붓글씨를 시작하셔서 국전에서 상을 받기도 하셨다. 며칠에 한 번씩 친정에 가면 무릎높이가 넘도록 화선지가 쌓여 있었다.
80대이신 지금도 밤 12시까지 책을 읽으신다. 한자도 틈날 때마다 읽고 쓰시는 천상 학자시다.
배움을 향한 아버지의 꿈은 시들지 않았고, 자녀들을 단단하게 키우셨다. 대기업에 다니는 아들 삼 형제와 간호사인 여동생 덕에 친구들이 노후대책 잘해 놓으셨다는 말씀을 하신다고 한다. 늘 바른 삶과 예의범절, 노력하는 자세 등 엄격하셨던 아버지가 요새는 살도 빠지시고 음성도 부드러워지셨다. 부모님이 뇌쇠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어느 날, 쌀을 가져가라며 세발리어커에 실으셨다. 우리들이 밀어도 되는데, 요령 없이 밀면 넘어진다고 한사코 리어커를 직접 밀어서 주차장까지 가져다주셨다. 아버지께 그런 자상함이 있으셨다. 바깥사람들한테는 세상 좋은 분이라고 늘 칭송을 받으시면서도 집에서는 근엄하셨던 아버지셨다.
IT 전문가인 아들을 두고(바쁠테니까...), 쓰시던 컴퓨터에 오류가 생기면 뭐가 잘 안된다고 나에게 전화를 하셔서 물으시는 아버지. 아주 간단한 것을 몇 번 알려 드렸더니, 내가 컴퓨터를 최고로 잘하는 줄 아시는 아버지. 한강 작가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으셨을 때, 한강 작가님 책을 사 달라고 하시고 [채식주의자]와 [작별하지 않는다]를 열심히 읽으셨던 아버지.
퇴임식을 마치신 후, 긴장이 풀려서 기운 없어 하신다. 감이 빨갛에 익었는데, 따기 어렵다고 걱정하셔서 감을 따드리러 갔다. 아프시다더니, 감나무에 올라가서 톱으로 죽은 가지를 자르고, 감을 따고... 원래 아버지는 그러셨다. 어쩌다가 일을 하시면, 옆 사람이 놀랄정도로 잘 하셨다. 낫으로 벼를 베어 눕혀 놓았다가 마르면 뒤집어서 타작하던 시절, 벼를 베다가 아버지 뒤를 보면 부채꼴 모양으로 나란히 나란히 노란 벼들이 한움큼씩 참말 예쁘게 줄 맞춰 눞혀있었다. 아버지는 그런 분이셨다. 매사에 완벽주의자.
아버지께서 사회활동을 하실 수 있도록 평생을 내조하시며 살아오신 세상 가장 존경스러운 현모양처 우리 엄마...... 두 분께 감사드리며 평안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