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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블랙홀

by 민휴

블루베리와 복숭아의 수확을 마친 후에도 우리는 쉼 없이 바쁘게 살고 있다. 이 시기라서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 하고 있는 중이다. 농번기에는 더 바빠서 할 수 없을 일들이 자꾸만 눈에 띄어서 쉴틈을 주지 않는다. 농장에서 일하는 시간은 짧아졌다.



내년 초에 블루베리를 넣을 하우스 텃밭에 씨앗을 심었다. 마지막 텃밭이라고 생각하니, 작은 씨앗들이 더 귀해졌다. 연작을 피해서 두둑마다 다른 씨앗을 심었다. 단단해진 땅에 물을 주고 괭이로 땅을 파고 있었더니, 옆지기가 다가와 물호스로 물을 뿌려 주었다.


한참을 일하다가 생각해 보니 뭔가 이상했다.


"근데, 뭐가 바뀐 것 같지 않나요?"


"아! 그렇네!"


우린 가끔, 역할을 잊고 무심코 행동한다. 객관적으로 봐도, 더 무거운 것을 내가 든다거나 하며 내가 더 힘든 일을 할 때가 있다. 옆지기는 온 힘을 다해서 일을 해내는 나를 엄청 힘이 센 사람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시금치, 상추, 열무를 심었는데, 열무가 가장 먼저 올라왔다. 상추는 조금 싹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시금치는 씨를 뿌린 지 일주일이 넘었는데도 아직 기미가 없다. 열무는 여린 새싹 위로 흙이 불쑥 들려 있다. 씨앗에게 지구를 들어 올리라는 벅찬 임무를 준 것 같아 미안해진다.



나도 자그마한 씨앗의 마음이 생길 때가 있다. 내 앞에 펼쳐진 문제들이 가볍지 않아서, 안간힘으로 버텨 온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무엇인지도 몰랐을 때, 무엇이 될 것인지도 몰랐을 때, 막막했던 것처럼 씨앗도 땅속에서 얼마나 무서웠을까.



씨앗이면 좋지, 기왕이면 알찬 씨앗이면 좋겠다. 흙도 자갈도 이기고 연둣빛 새싹을 틔울 수 있게~♡♡♡









느지막하게 심었던 서리태 콩을 수확했다. 아직 덜 익어서 푸른색이 남아있는 것들은 며칠 더 가을 햇살이 필요할 것 같아 남겨 두었다. 노랗게 익어서 콩 꼬투리에서 튀어나온 콩들을 몇 줌 주워냈다. 올해는 콩을 심고 망을 덮어주는 일을 빠뜨렸는데도 제법 잘 살아냈다.



새들이 파먹고도 남은 것들이 이만큼이나 많은지도 모르겠다. 자잘한 콩을 손끝으로 만져보면 밀도 높은 단단함이 온몸으로 번져온다. 삶도 그런 건 아닐까? 크기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라는 것.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이 모여서 알찬 삶이 영글어간다는 것.



돌을 골라 밭을 만들었고, 스무 평 정도의 밭에서 수확한 콩을 정겨운 사람들과 나눌 생각만으로도 행복하다. 비 소식이 없어서 바깥에서 말리며 아직, 밭에서 덜 익은 콩들을 응원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풀이 무성한 두둑에 부직포를 깔아 놓았더니, 옆 농장의 레트리버들이 마실 다니는 길이 되었다.



콩을 뽑아서 가지런히 놓아두었는데 레트리버가 나타났다. 콩을 밟으면 어쩌나 걱정하며 지켜보았더니 콩이 있는 두둑으로 가지 않고, 두둑아래 밭으로 간다. 레트리버도 가야 할 길을 아는구나 싶어서 대견한 생각이 들었다.








은행나무가 노랗게 변해가는 속도가 하루가 다르게 빨라졌다. 가을이 겨울에게 밀려나는가 보다. 겨울이 아무리 기승을 부려도 봄은 오고야 말겠지만, 서둘러 떠나는 가을은 해마다 쓸쓸하고 아쉽다. 농장에 손님이 오신다기에 은행나무가 잘 보이는 햇살 드는 곳에 의자를 놓았다.






텃밭에 물을 주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옆지기 이름이 떴다. 평상의 은행잎을 쓸러 갔는데, 어제 보았던 말벌이 스쳐갔다.


"무슨 일 있어요?"


"여기 와 봐! 청개구리 있어. 사진 찍어."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청개구리를 만나러 갔다.







보호색으로 평상과 비슷한 색깔로 변해 있었다. 겨울잠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은행잎 노랗게 물들면 오겠다던 친구들에게 연락해야겠다.


"얘들아! 은행잎 떨어지기 전에 만나자."






사진을 찍어 놓고 보니, 은행나무 한가운데 동그라미 무늬가 뚜렷하게 보인다. 가을이 빨려 들어가는 비밀스러운 가을블랙홀을 발견해 버린 것 같다. 어쩐지 유독 첫 번째 나무가 더 빨리 노랗게 변해간다 싶었다. 가을을 싣고 기차가 떠나간다. 가을은 기차를 타고~ 우리 농장에 가을블랙홀이 있다고 온 세상에 말해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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