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더들의 자존심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날.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소통'을 목격하곤 한다.
두 리더가 직접 만나 10분만 대화하면 깔끔하게 끝날 일을, 굳이 중간에 사람을 끼워 넣어 '전령'처럼 부리는 상황 말이다.
마치 죽어도 마주치기 싫은 앙숙이라도 되는 건지 아니면 서로 너무 거물이라 직접 움직이면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하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분명한 건 그들은 절대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그 소통의 책임을 제삼자에게 전가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두 팀의 리더 사이에 낀 '샌드위치'가 바로 나였다.
1. 총알받이가 된 메신저
시작은 언제나 가볍다.
"김 과장, 이번 프로젝트 협조 요청만 하고 오면 되니까 자네가 다녀와. 내가 굳이 갈 필요 없을 것 같네."
군더더기 없이 가서 전달할 사항만 전달하고 오면 되는 '업무 협조'. 말은 참 쉽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과정에서 오가는, 업무와 무관한 날 선 감정들이다.
상대 팀 팀장을 찾아가면 대뜸 이런 말이 날아온다.
"아니, 왜 본인이 직접 안 오고 김 과장을 보냈대? 이거 김 과장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 아니잖아.
할 말 있으면 본인 보고 직접 와서 이야기하라고 해요. 사람 우습게 보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나는 그저 메신저일 뿐인데, 상대방의 화살은 나에게 꽂힌다.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내 팀장에게 돌아가 보고하면 또 다른 폭격이 기다리고 있다.
"아니, 가서 협조 하나 받아오는 것도 제대로 못 해? 그게 어려워? 가서 다시 똑바로 말하고 와요.
이거 안 되면 손해가 막대하다고!"
상대 팀장이 했던 "사람 우습게 보지 말라"는 말은 차마 전할 수도 없다. 나는 그저 양쪽 진영에서 쏘아대는 감정의 총알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시킨 일 하나 제대로 처리 못 하는 무능한 패잔병이 되어 고개를 숙일뿐이다. 기분이 나쁘거나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때 나는 가장 손쉬운 표적이 되었다.
2. 함정으로 가득 찬 미팅
결정적인 사건은 중요한 협업 미팅 날 터졌다.
프로젝트의 성패가 달린 의사결정이 필요한 자리라 양 팀 리더의 참석이 필수였다.
그런데 팀장님은 가방을 챙기더니 나를 불렀다.
"김 과장, 내가 급하게 외근을 나가봐야 해. 오늘 안건은 나도 다 검토했으니까 자네가 들어가. 단, 절대 결정은 내리지 마. 그쪽 의견만 듣고 정리해서 나한테 보고해. 내가 없으면 그쪽에서 자기들 유리한 대로 끝내려고 할 거야."
팀장님은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적어주며 신신당부했다. 수차례 논의했던 내용이라 나도 잘 아는 부분이었다.
미팅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상대 팀 팀장님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대로 쿨하게 결정을 내려주셨다. 팀장님이 적어준 방향과 100% 일치했다. 프로젝트 일정상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합의했고, 미팅은 성공적으로 끝났다.
팀장님이 우려하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원하던 결과를 얻었으니 칭찬받을 일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내 착각이었다.
3. "당신이 팀장이야?"
복귀한 팀장님은 결과를 듣자마자 불같이 화를 냈다.
"결정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가 듣고 생각해 보겠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네, 하지만 팀장님이 원하시던 방향대로 상대방이 동의했습니다. 굳이 결정을 미룰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빨리 진행하는 게 프로젝트에 이득입니다."
"아니, 내가 결정하지 말라고 했죠? 근데 왜 결정을 하고 와요? 이상한 사람이네"
"팀장님이 적어주신 메모 내용과 동일합니다. 불필요한 미팅을 또 잡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리고 돌아온 팀장님의 마지막 한 마디에 나는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당신이 팀장이야?"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사람은 프로젝트의 성공이나 효율, 올바른 의사결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통제권을 쥐고 있는가'와
'자신의 권위가 훼손되지 않았는가' 뿐이었다.
내가 팀장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그런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는 리더와는 더 이상 논리적인 대화가 불가능함을 직감했다.
리더의 부재가 남긴 것들
이 지독한 경험을 통해 나는 '나쁜 리더십'의 전형적인 패턴을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다.
첫째, '가짜 위임'의 함정이다.
팀장님은 나를 미팅에 보내며 권한을 위임한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을 뿐이다.
진짜 위임은 결과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과정을 통제하려 들었고, 자신이 없는 곳에서 일이 잘 풀리는 것조차 견디지 못했다. 실무자에게 재량권은 주지 않으면서 현장으로 떠미는 행위는 위임이 아니라 '방임'이자 '방패막이 세우기'일뿐이다.
둘째, '감정'이 '목표'를 앞서는 순간 조직은 망가진다.
두 리더가 직접 대화하지 않고 나를 사이에 둔 이유는 간단했다. 그냥 둘이 섞이기 싫었던 것이다.
사적인 감정이나 자존심 싸움 때문에 조직의 효율성을 떨어뜨리고, 애꿎은 실무자의 에너지를 갉아먹는 것. 이것이야말로 리더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큰 직무 유기다.
셋째, 이길 수 없는 전쟁터에서는 '기록'만이 살길이다.
양쪽에서 욕을 먹는 샌드위치 상황이라면, 감정에 호소하기보다 상황을 객관화해야 한다. 나는 이후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양쪽의 요구사항을 메일이나 문서로 명확히 남겨두려 노력했다. "당신이 팀장이야?"라는 비이성적인 공격 앞에서는 논리도 무력해지지만, 적어도 나 스스로를 자책하는 늪에는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오늘도 두 리더 사이에서 눈치 게임을 하며 전쟁터를 오가는 모든 '직장인'들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낸다.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저 그들이 어른스럽지 못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