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만능주의'라는 착시

Part 4. 솔직함을 가로막는 3가지 착시: 마지막 장애물 걷어내기

by Motivator

“와 이걸 어디부터 읽어야 하는 걸까요? 자리비운사이에 메신저 창에 무려 80개의 메신저가 와있어요”

" 80개라고?”


팀원의 메신저 창을 확인해 보러 자리를 옮겼다. 정말 팀원의 메신저 창에는 읽어야 하는 메신저가 80개가 넘게 와있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길래 무려 80개가 넘는 메신저가 와있던 것일까?


해당 메신저 채널에는 20명 가까이 되는 업무관계자들이 초대되어 있었다.

[중요] A 프로젝트 방향성 유관부서 의견 공유

메신저의 스레드는 이미 80개를 넘고 있었다.

누구는 A 안이 좋다고 하고, 누군가는 B안의 리스크를 지적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C팀의 의견을 확인하신 후 결정하시죠라고 하며 책임을 넘긴다. 메신저 채널은 쉴 새 없이 울리지만 정작 아무도 "그래서 어떻게 합시다"라고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읽고' 있지만, 아무도 '결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참조'되어 있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


많은 채널을 만들어서 함께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소통하자고 만들었지만, 결과는 스트레스만 쌓이고 사내에는 메신저 지옥이라는 말이 우스갯소리로 돌고 돈다. 하루에도 수십 건의 업무 대응을 메신저로 하고 있는데 스레드가 80개씩 달리는 채널방에 초대가 돼있으면, 혹여나 나와 관계된 이야기가 나오면 대응을 해야 하기에 안 읽기도 뭐 하고 다 읽고 대응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시간이 필요하기에 직원들의 피로도는 계속 쌓여만 간다.


이런 상황은 어떨까?

신규 사업개발 방향을 정해야 하는 상황, A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2주 동안 열심히 PPT 50장짜리 '완벽한 기획안'을 만들어낸다. 그 기획안에는 A안, B안, C안의 장단점, 시장분석, 예상 리스크가 빼곡히 적혀있다. 그리고 A팀은 이 문서를 관련 부서장 5명에게 메일로 공유하며 이렇게 말한다.

"A, B, C안에 대한 저희 팀의 분석 자료입니다. 검토하시고 의견(Feedback) 부탁드립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문서'란, 캐비닛에 쌓인 낡은 종이 보고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신이 매일 아침 마주하는 끝없이 긴 '참조(CC)' 메일 스레드이며,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 남기는 슬랙 채널의 '기록'이고, "나는 분명히 말했다"는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캡처해 두는 메신저의 '텍스트' 그 자체이다. 매체는 디지털로 바뀌었지만, '기록 뒤에 숨으려는' 본능은 더욱 교묘해졌다. 우리는 이것을 '문서만능주의'라는, 솔직함을 가로막는 착시라고 부른다.


혹 누군가는 모든 사람이 정보를 투명하게 알아야 하니까요(For Transparency)."라고 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문서만능주의'가 만들어낸 가장 그럴싸한 착각이다.


이것은 '투명한 문화'가 아니다. 이것은 '숨는 문화'다.

'읽게' 만듦으로써 책임을 넘긴다.
A팀은 "우리는 A안으로 가고 싶습니다. 왜냐하면..."이라고 명확히 '밝히지' 않았습니다. 대신, A, B, C안이라는 '백과사전'을 던져주며 "이걸 다 '읽고' 당신들이 현명한 '결정'을 내려주세요"라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만약 나중에 C안으로 결정했다가 실패해도 A팀은 책임이 없습니다. "저희는 C안의 리스크를 분명히 '문서'에 남겼습니다."


'읽는' 사람도 다시 책임을 넘긴다.
이 메일을 받은 B부서장은 곤하다. 50장짜리 문서를 다 읽기도 힘들뿐더러, 섣불리 "A안으로 하죠"라고 '결정'했다가 책임을 지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렇게 답변을 한다. "분석 감사합니다. 그런데 D팀의 의견은 어떤가요? D팀까지 '참조(CC)'해서 다시 논의해 보시죠."


결과: 문서는 완벽해지지만 결정은 지연된다.
프로젝트는 '문서'만 주고받다가 한 달이 지연된다. 모두가 '읽고', '검토하고', '의견을 남기는' 행위를 통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증거'는 쌓았지만, 아무도 "그래서 A로 갑시다"라는 '결정'은 하지 않았다.


'읽는 문화'는 '숨는 문화'다

이 모든 복잡한 문서와 끝없는 '참조(CC)'의 행렬은 '솔직함의 부재'가 낳은 필연적인 결과다.

우리는 프롤로그에서 "왜 우리는 독심술을 연습하는가"라고 물었다. 이 '문서만능주의'는 독심술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의도를 명확히 '밝히는' 문화를 만들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나중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든 근거를 '문서'로 남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보를 공유하기 위해 문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방어하기 위해 문서를 쓴다.

"읽는 문화" (Reading Culture)
핵심: 문서와 기록, 그리고 '참조(CC)'
목표: 책임의 분산. "나중에 문제 생기지 않게 하자." (공포 기반)
결과: 모든 것이 느리고, 책임의 소재가 불명확하다. 모두가 문서 뒤에 숨어있다.


"밝히는 문화" (Revealing Culture)
핵심: 명확한 의도와 '말', 그리고 '결정'
목표: 문제의 해결. "지금 이 문제를 해결하자." (솔직함 기반)
결과: 실행이 빠르고, 책임자가 명확하다. 모두가 문제 앞으로 나선다.


'읽는 문화'는 투명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고 "문서 뒤에 숨는 문화"다.


솔직하게 말하고 결정하는 대신, '읽게' 만듦으로써 그 책임을 수신함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교묘히 떠넘기는 것이다.



'말' 한마디가 '문서' 수십 장을 이긴다.

다시 80개가 넘는 메신저 스레드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 수많은 '읽기'와 '기록하기'가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솔직함'은 단 5분 만에 해결한다.

만약 리더가 메일 스레드를 중단시키고, 핵심 담당자 3명을 회의실로 불렀다면 어땠을까?

"두 분 의견 잘 들었습니다. A안으로 갑시다. 결정에 대한 부분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B안의 리스크는 우리가 C로 보완하는 것으로 하죠. 자, 바로 시작합시다."


이 솔직한 '말' 한마디에는 80개의 스레드에는 없던 두 가지가 담겨있다. 바로 '명확한 의도'와 '책임지겠다는 선언'이다.

문서는 본질적으로 책임을 분산시키기 위해 존재하지만, 솔직한 말은 그 책임을 한 사람에게 집중시킨다.

조직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수십 장의 '면피용' 문서가 아니라,
리더의 책임감 있는 '말' 한마디다.


우리는 '투명성'이라는 착각에 빠져, 소통의 '비용'만 끝없이 높이고 있다. '읽는 문화'는 일을 하는 문화가 아니다. 그저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는 문화일 뿐이다.


키보드 뒤에, 끝없는 참조(CC) 목록 뒤에 숨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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