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에 카라반을 정박시켜 놓은 후로, 한 달에 한번 정도 카라반 캠핑을 다녔다. 동일한 장소를 계속 찾아갔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계절 변화를 입히면 전혀 다른 곳으로 변신하여 지루할 틈은 없었다. 봄에는 꽃구경, 여름에는 물놀이, 가을에는 단풍구경, 겨울에는 눈구경을 다녔다. 서울에서 회사와 집만을 반복하며 다니다 보면 계절의 변화조차 느끼기가 어렵지만, 캠핑장에 앉아 있으면 마른 가지에서 새로 틔이는 잎새 하나도 신기하고 재미있다. 꽁꽁 얼었던 냇가도 날이 풀리고 얼음이 녹으면 신기하게 새끼 물고기들이 헤엄을 치고 다닌다. 그런 소소한 재미 때문에 캠핑을 계속 다니는 것 같다.
올해는 벚꽃 개화 시기에 맞추어 양양에 꽃구경 캠핑을 다녀왔다. 양양은 서울보다 일주일 정도 꽃이 늦게 피고 진다. 벚꽃은 꽃이 피었다 지는 시간이 빠르고 그마저도 바람이 세게 불면 제대로 보기가 어렵기 때문에 만개한 꽃을 보려면 어느 정도 운도 따라주어야 한다. 그래도 서울의 벚꽃길보다는 한적한 편이라 우리 가족은 이맘때 꼭 꽃을 보러 오곤 한다.
토요일 새벽에 출발하여 9시쯤 속도에 도착하였다. 따듯한 순두부찌개를 아침으로 먹고, 영랑호를 찾았다. 한 바퀴를 걸으면 7km 정도 되는 작지 않은 크기의 이 호숫가는 어느 때도 좋은 풍경을 보여 주지만 4월 벚꽃철이 단연 아름답다. 이른 아침이어 호숫가에 사람들이 적어 한적하게 꽃구경을 하기 좋았다. 걷기 싫은 막내가 자전거를 꼭 타야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2인용 자전거를 한 시간 대여해서 호수를 한 바퀴 돌았다. 2년 전에는 페달링 하는 힘이 약해서 내가 정말 기운이 다 빠져 돌아왔었는데, 올해는 뒤에서 어찌나 열심히 하던지, 내가 덕분에 꽃구경 잘하면서 즐길 수 있었다.
속초는 번잡하고 식사할 곳도 마땅치 않아, 동해안 국도를 타고 죽도해변까지 내려왔다. 오는 길이 해안도로라 운전이 지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40km나 되는 거리를 내려온 이유는 이곳에 있는 버거집 때문. 이곳엔 내 경험상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감탄을 금치 못하는 수제 버거집이 있다. 70대 부모님부터, 30대 후배들, 그리고 10대 우리 아이들까지 인정한 곳이니 감히 남녀노소라 말할 수 있다. 새벽부터 움직여서 이미 꼬질꼬질해진 차림인 네 가족이 버거를 사들고 해변가에 나가 앉았다. 지난달 제주도 산방산 아래에서 찾아낸 수제 버거집의 그 끔찍했던 맛을 이야깃거리 삼아, 양양버거 예찬론을 떠들어 대면서, 찰랑찰랑 기분 좋은 파도 소리 들으며 맛있는 점심을 먹었다. 백사장, 파라솔, 파란 하늘, 푸른 바다, 파도소리, 모든 게 좋았다.
바쁠 것 없는 여행이니, 모래사장에서 모래성 쌓기도 한참을 하고 나서야 짐을 챙겨 이동을 하였다. 원래 양양 벚꽃은 남대천 둑길이 가장 유명하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찾아갔는데 꽃이 이미 많이 떨어져 있었다. 데일리로 체크할 때는 분명 만개 시점이었는데, 며칠 사이에 강한 바람을 이기지 못한 모양이다. 아쉬운 마음에 점심때 커피 사 먹으면서 눈도장 찍어둔 물치해변 둑길로 다시 돌아가서 마지막 꽃구경을 하기로 했다. 사실 지나가다 흘낏 본 길이라 벚꽃나무가 얼마나 있을지 몰랐는데,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 보니 1km 정도 되는 벚꽃길이 있었다. 이곳 나무들은 특이하게도 키가 낮았고 바닷가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라 그런지 바람도 많이 불지 않아, 나무 나무마다 꽃이 하나 가득 매달려 있었다. 둑길에 오가는 인적도 드물고, 그나마 다 마을 주민들 뿐이라 정말 실컷 꽃구경을 했다.
저녁식사를 하고 밤늦게서야 캠핑장에 도착했다. 두 달 동안 방치되었던 카라반은 눈비를 맞아 무척 더러워진 것 빼고는 별 문제가 없어 보였다. 식자재 창고에 있었던 음료수나 맥주캔들은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했는지 모두 뚱뚱하게 부풀러 올라있었다. 꽁꽁 언 카라반을 보일러 온풍으로 녹이는 동안, 우리는 밖에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낮에 많이 걸은 탓에 모두들 피곤하여, 일찍 짐 정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는 일어나서 혼자 산책을 나섰다. 주말 늦잠에 익숙한 우리 가족 덕분에 새벽에는 혼자 시간이 많은 편이다. 캠핑장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오색약수터는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지만 봄철에도 계곡가를 따라 걷는 새벽길이 무척 상쾌한 곳이다. 초입부터 성국사까지의 1.5km 길을 천천히 걸으며 사진도 찍고, 주중에 있었던 일들도 머릿속에 정리를 하며 쉼을 가졌다.
1박 2일 동안의 시간 동안 계획한 것 없이, 바쁠 것 없이, 쉬엄쉬엄 동네 마실 다니듯이 꽃구경을 다녔다. 끼니마다 동네 맛집 찾아다니며 맛있는 것 먹고, 보고 싶은 바다도 실컷 보고, 새벽에는 상큼한 공기 마시며 산책까지 하니, 몸이 다 건강해진 느낌이었다. 잘 비우고, 잘 채워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