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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리안 Dec 28. 2021

다시 정착

"어떻게 그렇게 오래 다니셨어요?"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겨울이 지난 후에야, 새로운 조직으로 발령을 받았다.

옮겨온지는 육 개월 정도 지났는데, 수습 아닌 수습과정을 거친 후에야, 어제부터 후배 세 명으로 구성된 작은 조직을 맡았다.

당황스러웠던 점은 이 조직에서 연차로는 내가 가장 고참 (늙은이) 이었고, 나이로도 두 번째였다.

40대 초반이라는 나이가, 이전 조직에서는 딱 허리 수준이었기 때문에 한 번도 부담이 된 적이 없었는데, 이곳에서는 거의 화석 같은 존재랄까.

팀 옮긴 후 어린 후배들에게 한 달간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 "어떻게 그렇게 오래 회사를 다니셨어요?"였다. 당황스럽던 날들의 연속.


이곳으로 오게 된 사유도 참 꼴사나웠다. 조직은 30여 명으로 구성된 실인데, 연구소장 직속 조직이었다.

보통 직속 조직은 두 가지 경우인데, '아주' 중요해서 연구소장이 직접 관리를 하는 경우와, '아주' 문제가 많아서 연구소장이 직접 관리하는 경우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머물 조직은 후자였다. 실장인 H 상무는 회사 창립 시절부터 쭉 연구조직에 몸담아온 이 분야 전문가인데, 안타깝게도 연구력은 100 일지 몰라도 정치력은 0인 캐릭터 같았다.

CTO와는 수십 년의 인연이 돈독하여 그동안 문제가 없었지만, 새로 부임한 연구소장이 사업부 출신이라 상극인 모양이었다. 조직의 막내들도 우리 조직은 곧 없어질 대상이라고 수근거렸다.


그래도 지난 6개월간 H상무가 가끔씩 방으로 부르거나 따로 식사를 하면서 조직 운영에 대한 조언을 많이 해주는 편이라 내겐 새로운 환경에의 적응이 도움이 되었다. H 상무와 이전부터 연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옮겨오자마자 내게 맡겼던 국책 사업이 의외로 잘 풀려서 수주를 하게 된 점이 좋은 인상을 준 모양이다. 그리고 지금 조직의 팀장이 그동안 내내 골치를 썩혀와서 팀원들과 불화가 쌓이고 쌓여있던 것도 어느 정도 이유가 된 것 같다.


어찌 되었건, 난 더운밥 찬 밥을 가릴 처지가 아니다. 자매사 전출 신청을 했던 이력에 대해서는 연구소장도 다 아는 상황에 '배신자' 주홍글씨가 지워질 때까지 조용히 살아야 한다. 마침 새로 맡은 프로젝트가 지난 15년간 늘 내가 동경해 오던 분야인 점은 천만다행인 일이다. 일만 열심히 하며 다시 한번 기회를 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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