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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혁 Jan 02. 2022

자기애와 자기혐오가 동시에 있습니다

두 가지가 적절히 있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길이다

생활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았지만 행복하고 화목한 집안에 어느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초등학생이었던 아이는 온 학교와 동네를 떠들썩하게 뛰어다니는 골목대장이자 세상에 아무도 못 말릴 꼴통이었습니다. 부모님 뿐만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은 탓인지 자신감과 함께 고집도 남달랐습니다. 그러나 주위엔 그렇게 나대는 아이가 꼴 보기 싫은 무리가 항상 있었습니다. 그들은 머리 쪽수를 앞세워 나대는 아이를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상이 자기 것인 것 마냥 행복했던 아이는 학교폭력과 왕따로 인해 육체적인 장애를 가졌으며 동시에 언어장애라는 정신적인 장애도 생겼습니다.


말수가 줄어들고 학교생활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는 혼자 있는 시간을 즐겼고 혼자만의 공간에서 안락과 행복을 찾아나갔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매우 비하했기에 학창 시절은 떠올리고 싶지 않은 지옥 같았던 시절이었습니다. 희망 같은 건 없었기에 공부 같은 건 역시나 하지도 않았고 어서 빨리 지옥 같은 시간이 지나고 성인이 되길 바랐습니다. 성인이 되면 무언가 자신이 원하는 세상이 조금이라도 다가와줄 것 같았습니다. 그렇기에 학창 시절은 추억은커녕 떠오르는 태양이 원망스러울 정도의 악몽의 시간이었습니다. 고등학생이 시작될 무렵 아이는 단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빨리 졸업해서 어른이 돼야지. 그래서 세상에 나가면 보란 듯이 잘되야지."라고요.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왔을 땐 다시금 희망과 열정이 솟구쳤습니다. 자신을 괴롭히거나 구속하는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런 삶을 꿈꿨습니다. `무탈`은 아이가 생각하는 행복의 경지였습니다. 그저 공부 잘해서 좋은데 취직하길 바라는 부모님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그것이 그렇게 큰 불효였는지 깨달았습니다. 

학창 시절의 억울했던 시간들과 육체적, 정신적으로 잃고 파괴되었던 것들을 보상받으려 애썼습니다. 원하는 일과 삶을 찾아다녔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까지 벌며 누구도 부럽지 않은 20대의 화려한 청춘을 보내려고 애썼습니다.


그러나 그런 향 찬란한 순간에도 어둠은 늘 드리워졌습니다. 후천적인 언어장애로 인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꿀 먹은 벙어리의 삶이 많았습니다. 티 나는 상황과 모습은 아니었지만 하고 싶은 말, 해야만 하는 말 등을 하지 못해 손해보고 억울했던 순간들이 수십수백 번이었습니다. 그렇게 정신이 쓰러져 갈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이 육체의 불편함도 같이 찾아와 일상의 삶은 지옥일 때가 많았습니다.


그중 무엇보다 가장 큰 것은 자존심이었습니다. 내외적으로 불편한 자신의 모든 것들을 그 누구에게도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수없이 애쓰고 또 애쓰던 비참한 모습을 늘 거울로 보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원하는 삶을 원했기에 그 누구보다 행복감에 넘치는 자기애는 원치 않는 순간들이 찾아올 때마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자기혐오가 강하게 드러났습니다. 스스로가 통제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기에 그 모든 순간들을 위태롭게 잘 건너온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30대의 끝자락에 들어 서고 나니 악착같이 붙들고 있던 줄을 조금은 느슨하게 풀고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온화함이 마음에 싹트고 얼굴에도 드러났습니다.




원래는 선천적으로 밝은 아이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두운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기쁨과 행복 뒤에 다가올 슬픔과 불행들을 맞이할 방법을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즐거우려고 아무리 노력을 해도 짙은 슬픔이 몇 날 며칠 온몸과 정신을 지배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럴 때 종종 벽에다가 혹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잣말로 내뱉곤 했습니다. "왜 나야? 왜 나냐고? 난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데 왜 내가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해? 대체 누가 말 좀 해줘. 내 의지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내 정신과 육체를 언제쯤 가질 수 있는지를..."  


그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삶을 끊고 싶을 정도의 불안과 고통은 한동안 종종 찾아와서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어두운 곳엔 반드시 빛이 있는 것처럼 고통 뒤엔 늘 행복이 있다는 진리를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고통은 행복으로 가기 위한 필연임을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런 큰 진리를 마음에 품고 나니 거짓말처럼 육체와 정신의 장애는 조금씩 사그라들어감을 느꼈습니다.




혈기왕성했던 시절엔 정말 감정의 기복이 컸었습니다. 하루 종일 좋아라 웃으며 떠들다가도 갑자기 어두운 낯빛으로 아무 말도 안 하는 일상을 보내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인간관계도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마음은 아니었지만 하던 일을 갑자기 그만둔다거나 연락하는 사람들과의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어버리는 행위를 했으니 말입니다. 분명 타인들 눈엔 이상한 정신병자나 그냥 병신으로 밖엔 안 보였을 것입니다.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해도 됐습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모든 순간들이었습니다. 너무나 무겁고 커다란 바위덩이가 짓누르는 것 같았습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악몽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어쩔 수 없는 순간은 누구나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스스로 통제가 안 되는 상황들은 기나긴 삶에 있어 충분히 여러 군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생각보다 잦은 주기로 있다면 일반적인 모습이라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아이는 스스로 싸워왔습니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준 것 같았습니다. 흘렀던 많은 시간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커지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니 잊고 있었던 자기애가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렇다고 자기혐오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습니다. 커져버린 자기애만큼 자기혐오가 줄어든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혐오로 인해 손해보고 잃었던 것만이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부정적인 것들로 인해 얻은 것도 많았습니다. 그중 가장 큰 것이 겸손이었습니다. 연관성이 없는 것 같지만 나 스스로를 미워하는 감정으로 낮아진 곳에서 위를 바라보니 자연스럽게 겸손의 마음이 커져갔습니다.




"자신을 사랑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해주지 않으면 누구도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습니다."

수많은 책의 글귀에 비슷한 말들이 많습니다. 이 말은 보편적으로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보다 자기혐오가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뜻입니다. 알고 보면 모두가 이 두 가지를 전부 갖고 살아갑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정도에 따라 자신의 모습이 그렇게 보일뿐 하루에도 수십 번 외줄 타기 같은 마음으로 흔들리며 살아갑니다.


정중앙의 밸런스는 평생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위태롭지만 최대한 맞추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자신도 모르는 자신이 원하는 삶의 비단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중심을 잡고 살아간다면 반드시 뜻하지 않는 것들을 품으며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영원한 나락과 고통은 없습니다. 빛은 어두울수록 더 밝게 보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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