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와 거절은 별개의 것인데도 우리는 이것을 하나로 보는 경향이 많다. 그렇기에 거절은 그 상황이나 문제만을 일삼는 게 아닌 상대방과의 연을 이어 나가느냐의 문제로 치닫게 된다. 그래서 거절의 유무로 인해 수많은 오해가 생기고 원치 않는 관계로 흘러가기도 한다. 거절을 표현하는 자체는 타인과의 관계에 벽을 쌓겠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기도 하다. 우리는 벽을 쌓는 궁극적인 이유가 적대감으로 경계하며 싸우겠다는 뜻이 아닌 타인과 나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뿐이라는 걸 인지해 줘야 한다. 따라서 거절에서 가장 필요한 건 잘 잘라낼 수 있는 칼이 아닌 다른 상황과 의견을 잘 쳐낼 수 있는 방패가 필요하다. 거절을 잘한다는 것은 마치 싸움을 잘하기 위해 무술을 배우는 것이 아닌 나쁜 사람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한 호신술을 배우는 것과 같다. 자신을 방어하고 대변해 줄 수 있는 다양한 방패를 갖고 있으면 자신의 울타리에 타인이 쉽게 넘어올 수 없다.
모든 거절을 단호한 ‘NO’로 해결할 순 없다. 상황에 적절하고 현명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관계를 지키면서도 자신의 것을 유지할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은 천차만별이기에 유동성 있게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단호하고 확고한 ‘NO’가 필요할 때도 있다. 상식적이지 않은 생각의 사람, 감당하기엔 부담스러운 부탁, 타인의 상황은 안중에도 없고 자신의 발등에 떨어진 불을 어떻게든 끄려는 타인이라면 흔한 말로 걸러야 한다. 크기와 두께가 다른 방패들을 적재적소에 잘 배치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것 같은 상황에선 최대한 크고 두꺼운 방패를 준비해야 한다.
부탁을 하는 입장에서는 본의 아니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언행으로 표출될 수 있다. 원래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사람의 본성이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는 순간에 의도치 않는 모습으로 나오기도 한다. 벼랑 끝에 몰리면 자신도 모르게 본모습이 나오는 것처럼 ‘부탁과 거절’은 타인의 진면목을 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부탁들을 쳐내거나 들어주는 행위로 여러 가지 모양과 크기의 방패를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다. 자신 또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부탁을 할 경우 상대방이 어떤 방패를 쓰는지도 알 수 있다.
성공을 위해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으로 이득을 취하려면 창이 필요하다. 그러나 끊임없는 전진은 무엇이 부족하고 무엇이 새어나가고 있는지 가늠할 여유가 없다. 삶을 열심히 살고 있는데도 늘 뭔가 허전하고 부족한 이유는 물질적인 이유뿐만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적으로도 새어나가고 있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방패를 갖는다는 건 새어나가는 것을 막는 일이다. 내 것을 능동적으로 지키겠다는 행위이다. 돈을 버는 것만큼 번 돈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데 우리는 번 돈을 지키는 교육보단 더 늘리거나 부풀리는 수단과 방법을 찾고 동경한다. 정신과 마음의 안정을 찾기 위해 시간과 돈을 들여 듣고 배우지만 정작 한순간에 흐트러질 수 있는 외부와 타인의 공격을 방어하거나 멈추는 방법은 모른다. 그동안 쌓아둔 수많은 소중한 것들이 존재하기 위해선 자기 자신이 건재해야 하지만 가장 나중으로 미뤄두며 삶을 살고 있다. 견디고 버티는 것에 한계가 있는 걸 알면서도 어떠한 방어적인 수단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결국 착한 사람으로만 살다가 모든 걸 잃을 수도 있는 악몽의 길을 걷게 된다.
이상적인 인간은 이기적인 것과는 최대한 멀면서 개인주의에 가깝지만 필요에 따라 이타심을 한두 방울 첨가할 수 있는 모습이다. 이타심을 첨가하는 건 인성의 크기와 관련이 있고 무탈한 개인주의의 모습을 만들어가는 건 방패를 갖는 것이다. 감정의 관계에 큰 변화가 없고 서로 다치지 않는 모습을 지켜주는 방패는 최대한 말랑하고 넓은 것으로 충격을 흡수하는 방패이다. 이런 완벽한 방패를 모두가 갖는 건 쉽지 않다. 이렇게 충격 흡수도 좋고 말랑한 방패를 갖지 못한다 하더라도 방패 자체가 있다는 건 자신을 지켜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기에 우리는 자신만의 방패를 다양하게 모으고 가져야 한다.
삶에 필요한 방패 5가지.
1. 조급하지 않은 느긋함 대답을 미루고 자리를 피해서 상대방이 생각하게끔 해준다. 부탁을 받은 입장에선 상대방의 부탁이 급한 큰일인지 그렇게 급하지 않은 작은 일인지를 구분하기가 힘들다. 큰일을 부탁한 거였으면 자신 말고도 다른 이에게 부탁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상대방은 어느샌가 해결했을 수도 있다. 작은 일을 부탁한 것이라면 잊어버렸거나 부탁을 안 들어준 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수 있다. 부탁을 받은 입장에선 무조건 마음이 급해지기 마련이다. 그저 연못에 작은 돌을 하나 던졌을 뿐인데 연못 안의 생명들은 큰일이 난 것처럼 분주해지는 상황이다.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을 적당히 끄는 행위는 타인과 자신의 상황의 균형을 맞춰주는 역할을 한다.
2. 진지함 덜어내기 부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최대한 가볍게 듣고 수용한다. 자신의 어떤 구역을 침범하려 할 때 얼굴 표정이 확 바뀌면서 단호하게 ‘싫어’라고 하면 바로 물러나기보단 반박이나 반감이 생겨서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까지 미적거리며 쉽게 물러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다. 부탁을 받는 입장에서 최대한 얕고 깊지 않게 생각을 하면 타인의 조급함이 진짜인지 아닌지를 파악할 수 있다. 부담 없는 언행은 타인에게 기대를 심어주지 않음과 동시에 자신 역시 상대를 무시한 게 아니어서 부탁 자체가 흐려질 수 있다. 타인과 자신에게 큰 대미지가 없는 현명한 생각이자 관계에도 문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3. 단호한 생각을 너그럽게 ‘하지 마라’라는 방어의 표현보단 ‘하지 않는 것이 당신을 더 이롭게 한다’라는 태도로 타인을 너그럽게 대한다. 이것은 단지 자신에게 피해를 입히려는 누군가를 떨어트리거나 따돌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타인이 자신을 쉽게 생각하거나 함부로 대하지 않게 생각을 바꾸는 역할을 한다. 그러기 위해선 단호하지만 낮고 부드러운 언행이 필요하다. 명확하고 단호한 말을 부드럽게 표현을 한다면 상대는 분명 자신을 무겁고 어렵게 생각한다. 생각과 정신이 올곧은 상태에서의 표현은 원치 않는 타인의 행위를 그만두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타인의 모습을 변화시킬 수 있다.
4. 성의를 보인다는 배려 부탁을 하는 입장을 헤아리거나 판단하는 건 결코 쉽지 않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킨다면 상대방은 웬만해선 진심을 알아준다. 그러면 오로지 자신에게만 집중하면 된다. 어차피 거절을 할 것이지만 최대한 상대에 대한 예의와 매너를 지켜야 한다. 무조건적인 부정보단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와 같이 말이라도 성의를 보여야 한다. 이것은 타인과 나를 위함과 동시에 관계를 흐트러트리지 않는 기술이다. 기대를 하는 건 상대방의 몫이고 자신은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알아봤는데 힘들 것 같습니다.’ ‘저도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라는 정중한 언행은 부탁과 거절이라는 문제와 해결에게만 집중을 하고 관계나 감정에는 영향을 덜 미친다.
5. 진중하고 무거운 거절 두껍고 딱딱한 방패가 필요할 때도 있다. 관계의 기준은 저마다 다르다. 보통은 만남의 횟수나 알고 지낸 시간에 비례한다. 또한 거의 모든 사람은 소통의 시간과 질에 따라 관계의 깊이를 논한다. 몇 번 보지 않았거나 알고 지낸 시간이 길지도 않은데 무리한 부탁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몇 년 만에 연락을 해서 경조사를 알리는 일, 아무리 생각해도 이 정도를 해줘야 하나,라는 생각이 드는 일, 부탁 자체가 목표가 되는 일은 무시하는 것이 맞다. 이 같은 모습에선 관계는 전혀 안중에도 없는 부탁의 목적을 이루려는 이기적인 행위일 뿐이다. 최대한 감정을 싣지 않고 덤덤하게 무시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일에 감정을 섞으면 자신만 힘들어진다. 두껍고 큰 방패를 앞에 놓으면 그만이다.
적대감은 드러날 수밖에 없는 감정이다. 그러나 일상이 감정에 지배되어 버리면 원치 않는 상황과 사람에게 품고 있던 적대감이 드러나 삶은 괴로움의 속박을 벗어날 수 없다. 타인의 안위를 살피는 일은 결국 스스로의 성장을 위하는 길임을 인지하고 명심해야 한다. 타인과의 적당한 거리를 조절하고 지켜나가는 지혜와 현명함은 자신에게 이익이 될 미래의 삶을 다져나가는 것이다. 타인이 없는 혼자만의 승리와 성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계의 시행착오로 인해 만들어진 유연하고 말랑한 방패들은 타인이 넘볼 수 없는 자신만의 든든한 성을 구축해 나가는 명확한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