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없는 아이

그림자를 찾는 시간

by 공작

그림자조차 없는 아이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묘한 공허함을 느꼈다. 슬픔보다 바빴다. 얼굴도 가물가물한 친척들을 맞이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생전에 할머니가 정성으로 길러준 손주들 중 몇은 끝내 오지 않았고, 와서도 서둘러 올라갔다. 요양원 한 번 찾지 않았던 이들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는 내 손끝이 어딘가 허전했다.


그때 서울에서 내려온 친척오빠가 내게 말했다.
“넌 어릴 때 정말 영특했어. 말을 얼마나 잘했는지 몰라. 너 잘될 줄 알았는데…”
그 말이 낯설었다. 오래된 기억 속 어딘가에서 불쑥 꺼내든 이름표 같았다. 나는 잠시 웃으며 대답을 흘려보냈다. 장례식장 한편에 가지런히 놓인 국화를 바라보다가, 문득 살아 있는 내가 누구인지 되묻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 내 목소리를 잃었을까.


부모의 싸움과 불안이 일상이던 집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슬픔도 기쁨도, 웃음도 눈물도 모두 감춰야 했다. 나는 늘 조용히, 들키지 않게, 숨죽이며 자랐다. 반항은 사치였고, 그저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결혼 후 남편의 직장을 따라 타지로 이사했을 때, 처음으로 해방감을 느꼈다. 발소리를 죽이지 않아도 되는 집, 나를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공간.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숨통이 트였다. 다시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친척오빠의 말은 잊고 있던 나를 불러내는 주문 같았다. 그가 기억하는 나는 영롱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던 아이였다. 하지만 그 아이는 자라면서 점점 사라졌다. 그림자처럼 조용히 살다가, 어느 순간 그림자조차 없는 아이가 되어 있었다.


이제야 안다. 나는 미워했던 부모의 불안 속에서 자랐고, 그 불안이 내 안에도 뿌리내렸다는 것을. 그러나 그 흔들림 속에서 나는 나를 함부로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감정을 대신 감싸며 사는 법을 배운 건, 어쩌면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엄마 아빠가 힘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되도록 문제를 만들지 않고 조용히 없는 듯 공부만 하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세상엔 부모의 온전한 사랑 아래 자라지 못한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그림자를 부정한 채 어른이 된다. 하지만 그림자가 없는 삶은 존재하지 않는 삶이다.
이제 나는 내 안의 그림자를 꺼내어 빛 속에 세워두려 한다. 이제 나는 나를 스스로 빛으로 인도할 힘이 있기 때문에. 어른이기 때문에.
어둠이 있어야 빛이 선명해진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야 알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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