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

인생에세이

by 공작




지하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오랜만에 옆집 아주머니를 만났다. 어머니 연배인 아주머니는 다소 깐깐해 보이지만 막상 이야기를 나눠보면 인심이 넉넉하신 분이다. 그녀가 처음 우리 집 초인종을 누른 것은 혹시 제주도에서 올라온 콜라비 택배를 우리 집에서 잘못 가져간 건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알고 보니 아랫집으로 택배가 잘못배달된 것이었고, 아주머니는 나를 오해한 것이 미안했는지 싱싱한 콜라비를 맛보라고 주셨다.

그때 먹었던 아삭한 콜라비가 생각나서 맛있었다고 말씀드리자 아주머니가 반색하시며 물었다.


"늙은 호박 드릴까요? 내가 밭에서 따왔는데"


대답도 하기 전에, 아주머니는 가로 40cm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늙은 호박을 내게 안겨주었다. 옆에 있던 남편은 너무 크다며 깜짝 놀랐지만 너무 즐거워하시며 주시는 손길을 거절할 수 없었다.


"아휴, 호박죽도 만들고 반찬도 만들 수 있겠네요,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라며 너스레를 떨고 집에 들어갔다.


나도 뭔가를 드려야 할 거 같아서, 부랴부랴 집에서 샤인머스캣 두 송이와, 얼굴팩을 챙겨서 옆집아주머니께 가져다 드렸다.


늙은 호박은 마트에서 구경하기도 어렵고, 내가 일부러 사는 식재료가 아니었다. 일단 껍질이 많이 나오는 채소는 내 장바구니에서 제외대상 1순위다. 주방일이라는 게 시간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들면 아무리 맛이 있다고 해도 지치기 때문이다. 반면 칼질이 손쉬운 애호박은 찌개와 반찬에 쓸모가 많아 내가 좋아하는 식재료다. 그러고 보면 늙은 호박입장에서는 억울할 만도 하다. 껍질이 단단하고 크고 색이 바래있다는 이유로 나 같은 서툰 주부한테 외면당하기도 하니까. 하필이면 익은 호박도 아니고, 다짜고짜 늙은 호박이라고 하니 얼마나 억울할까? 늙었다는 것이 가치 없다는 것은 아닌데 말이다. 겉은 볼품없어도 속은 꽤 쓸모가 있는 늙은 호박입장에서는 괴로울 것이다.


큰맘 먹고 방치했던 늙은 호박을 주방으로 가지고 왔다. 늙은 호박은 꽤 단단해서 쉽게 자를 수 없다. 그래서 익혀서 잘라야 하는데 너무 커서 칼로 먼저 자른 뒤 익히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서 늙은 호박을 다섯 조각으로 잘랐다. 첫 칼은 한번 박힌 것이 나이 들어 쌓인 상처와 패턴에 걸려 다시 나오지 않아 칼을 빼느라 애를 먹었다. 살다 보면 한 번은 나를 갈아 넣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다 보면 조금은 융통성이 없어지기도 한다. 나를 감싼 단단한 껍질을 벗기려면 작은 칼이 아니라 때로는 큰 칼로 통렬한 충격을 줘야 한다. 힘주어 반복되는 칼등에 손이 닿아 물집이 잡혔다. 충격으로 인한 상처도 감당하는 것은 덤이다. 단면을 열자 국수 같은 주황실 섬유질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 호박은 속이 여리고 부드럽지만, 늙은 호박은 단단한 껍질을 가르면 깊은 단맛과 밀도를 품은 과육이 품위 있다. 실패를 겪어낸 감정이 고귀하듯이 늙은 호박의 맛은 은은하고 오래간다.


씨를 빼고 전자레인지에서 5분 돌린 후 껍질을 칼로 벗겨내고 손질해 놓으니 호박만 한 바구니다. 냉동에 소분하여 넣어놓고, 호박죽을 끓였다. 손질된 호박을 찐 후 믹서기에 곱게 갈아서 다시 냄비에 넣고 끓이다가 물과 찹쌀가루로 농도를 맞추고, 소금과 설탕을 넣으면 된다. 눌어붙지 않게 잘 저어주면서. 조리법은 간단하지만 뒤처리는 간단하지가 않다. 여기저기 튄 호박껍질과 굴러다니는 씨앗, 끓은 죽이 튀어 여기저기 어지럽힌 잔해들을 처리하는 과정도 이겨내야 한다. 유튜브를 찾아보니 호박으로 호박인절미 만드는 방법이 나와있어서 일을 벌인 김에 인절미까지 만들어버렸다. 주방은 더 난장판 속에서 굴러갔다.


오랜 기다림을 견딘 호박이 참 맛을 낸다. 내 인생은 끓는점이 높은가 보다. 얼마나 더 참 맛을 내려고 이렇게 버티고 있는 것일까. 불 앞에서 오래 서있는 시간자체가 어쩌면 나를 익히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버텨야 맛이 나는 늙은 호박처럼.

호박죽 한 그릇을 식탁 위에 올렸다. 투박한 겉모습은 사라지고 부드럽고 고운 음식이 되었다. 서서 고생한 시간은 잊어버릴 정도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호박죽이었다. 찹쌀이 호박의 향기와 섬유질을 품으니 호박인절미가 고급스럽다. 젊음을 잃는 대신 숙성을 택한 늙은 호박의 환상적인 맛처럼, 나도 세월을 견디고 나면 누구에게나 부드럽게 스며드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쇠퇴가 아니라 숙성이다.

-늙은 호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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