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과 할머니
시골이지만 한때는 대학생 과외선생님이 와서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했고, 피아노 학원도 다녔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어학원도 다녔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초등학교에서 만난 선생님과의 일화다. 초등학교 3학년 때 교실을 못 찾아 한참 헤매고 들어선 교실에서 선생님은 채근보다는 먼저 늦은 이유를 물어봤다. 나는 부끄러운 마음에 교실을 못 찾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오다가 동생을 만나서 늦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맞아주었고 내가 교실을 찾아 헤매느라 더러워진 실내화를 벗어 들고 들어서자, 반 아이들에게 박수를 쳐주자고 하셨다. 내가 만난 선생님들 중 가장 따듯했던분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도 같은 선생님이 되었는데, 나는 유독 그때 받은 상장이 많다. 학교에 다녀오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공부를 했고, 신기하게도 내가 공부한 문제가 시험에 자주 나왔다. 학교가 끝나도 집에가지 않고, 친구들과 남아서 우리만의 이야기로 교실을 채웠고 때로는 풍금을 칠수있는 기회도 가졌다. 다정한 선생님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선생님께 내가 느꼈던 다정함을 우리 할머니는 가족중 누구에게 받아보았을까? 늘 일하고 먹여주기만 했던 할머니의 희생은 천덕구러기가 되어 돌아왔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오니 할머니가 나물을 다듬으며 울고 있었다. 할머니는 넷째 큰아버지네 집에서 아이들도 봐주고 살림도 봐주다가 오시곤 했다. 할머니가 서울로 가는 날은 8살 꼬마가 견디기 힘든 이별의 날이었고, 서울에서 전주로 돌아오는 날은 동구밖을 쳐다보며 하루종일기다렸다. 큰아버지와의 갈등으로 할머니는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보상도 제대로 못 받고, 쫓겨나듯 그 집을 나오셨다. 그땐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언젠가 엄마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사건의 전말을 알았다. 어느 잔칫집에서 농담 삼아 서울에서 식모살이 하고 있다는 말을 했는데, 그 말이 큰아버지의 귀에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식모살이 하는 것 같으면 내려가라며 할머니를 모질게 쫓아냈다.
어쨋건 나는 할머니가 더이상 서울에 가지 않아서 정말 좋았다. 할머니가 멍 들어있는 내 몸에 안티푸라민을 발라주며 엄마를 욕하던 생각이 난다. 큰 시골 집 살림을 도맡아 하느라 힘들었을 것이고 말을 듣지 않는 황소같은 아이들을 다스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매를 때리는 것 이었으리라. 남동생은 어렸고 남자애였지만 너무 이쁘게 생겨 때릴 마음이 안 났는지, 항상 내가 대표로 맞곤 했다. 지금 같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엄마의 매질을 피할 수 있는 내 피난처였고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은 할머니의 사랑이 감싸고 있었다.
"우리 지희는 손이 야무지당께"
찰흙으로 열심히 만든 미술 숙제를 보여주면 할머니는 손재주가 좋다고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나도 조용히 중얼거려본다.
"우리 할머니 손녀라 그렇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