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로 인해 당분간 강의가 모두 취소되었다. 아마 4월까지는 일이 없을 것 같다. 이럴 때를 대비하지 않았던 자영업자 프리랜서들은 상당한 도전의 기간이 될 것 같다. 이 시기를 회복과 변화의 모멘텀으로 만들기 위해 열심히 마음을 굴리고 있다. 최근 일주일 사이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어떻게 실행할까 궁리하느라 머리가 후끈후끈 돌아가고 있다.
월요일에 부동산을 다녀왔는데 이미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프로젝트 몇 개 성공시킨 기분으로 잠이 못 들더니 화요일이 되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과 우울의 늪으로 풍덩 들어갔다가 수요일에 다시 땅을 디뎠다. 다행히 화요일 오후에 바디웍 세션을 받아서인지 소진이 덜하다.
터닝포인트 하면 생각나는 책이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그림책이다. 중학교 2학년엔가 과천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중학교 3년간 독서토론 모임을 했었는데 그때 이 책으로도 토론을 했었다. 중학생 민희의 관점에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어떤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고민하던 시기에 입시경쟁을 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고 실업계 고등학교에 자발적으로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은 3년간 신나게 놀고 아르바이트도 많이 했다. 권 반장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친구들과도 잘 지냈다. 안양일번가를 누비며 정말 잘 놀았다. 그 와중에 성적은 별로였지만 운이 좋게 N은행에 인턴 채용되어 2학기부터 출근을 하게 되었다. 연초 정식 공채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사했지만 창구 업무와 더불어 여러 차별적 상황에 저항하면서 무단결근을 했다. 8개월간 인내심은 고갈되었다.
집에는 출근하는 척하며 안양 일번가 프리맨 커피숍에서 한 달간 주방 알바를 했다. 파르페를 열심히 만들었다. 은행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에스프레소 기계 따위는 없던 시절이었고 삐삐를 가지고 다녔다. 테이블마다 전화기가 놓여있었는데 그곳에 앉아 전화를 한참 하던 사람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까 궁금하다. 한 달 알바 후 정규직과의 사회적 격차를 깨닫고 당시 L 모 그룹에 지원해 입사한다.
N은행의 갑작스러운 퇴사 이후 집안에서는 나를 조심하는 분위기였다. L기업 입사 후 춤을 배우기 시작했고, 패러글라이딩, 수상스키, 스쿼시 등 과격한 레포츠를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그땐 그 분노가 나의 것임을 알지 못하고 무조건적으로 상황 탓만 했다. 문화 행사, 공연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사는 모습은 변하고 있는 듯했지만 내적인 터닝포인트가 좀처럼 찾아지지 않았다.
그 덕분에 만 2년 만에 L기업도 갑작스러운 퇴사로 정돈이 되었다. 앞서 두 곳의 경험으로 을지로에 있는 K은행 본점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며 대학 입시를 준비했다. 2000년에 새내기가 되었다. 즐겨보던 문화 잡지의 월 모임에 참여하면서 필진이 되어 글을 쓰기 시작했고, 남자 친구도 만났다. 다양한 잡지와 출판물에 프리랜스 기자로 일하고 대필작가가 되기도 했다.
역시 사는 모습은 변했지만 내적인 터닝포인트는 의외의 순간에 왔다. 정운영 교수님, 작고한 경제학자 정운영 교수의 경제학 원론 수업을 들으며 반듯한 기준점과 자유를 경험했다. 그분과의 인연으로 삶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기도 하고 철학과 편입 시험에 도전하기도 했다. 뭔가 내적인 탐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며 인도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2002년 인도 여행을 하면서 만난 바라나시의 요기(인도인도 아니고 이스라엘 사람이었다)를 보면서 아주 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정성스럽고 꾸준한 무엇이 내겐 필요했다. 상처 받고 화가 많았던 나에게 그런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요가를 시작했고, 불교를 만났다. 2003년에 만난 두 명의 스승(이태영 원장님과 법륜스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수행을 시작하면서 나에 대해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시작했다. 내가 보고 싶은 나와 남들이 보는 나, 실제의 나의 차이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동전의 양면처럼 삶을 배우기 시작하니 죽음을 배워야 했다. 2005년 봄 오빠와의 이별을 기점으로 새 삶이 시작되었다. 무의식적으로 경쟁하고 무시했던 하나뿐인 혈육의 죽음은 존중과 사랑이 무엇인지 탐구를 시작하게 해 주었다.
요가, 불교, 명상, 수행 다양한 치유 작업들을 탐구하다 직업으로 일치시킨 것이 2010년부터다. 국내 최초의 클라우드 펀딩 사이트에서 힐링 클래스를 펀딩 하기도 하고 나의 모든 자원을 들여 정성을 쏟았다. 그 결과 2012년 창업을 하기도 했다. 창업이라는 이름이었지만 2012년 한 해는 좌충우돌 실수투성이였다. 2013년 초 겨울에 할머니와 이별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형태로 콘텐트를 개발하는데 박차를 가했다. 삶의 방향성이 나를 위한 것에서 사람들에게 쓰임이 있는 존재로 방향이 바뀌기 시작했다. 10년간의 기도 공덕이었을까 사람들을 돕는 아봐타 마스터가 되었다.
아봐타 마스터로 첫 꿈은 100명의 학생과 함께 성장하는 것이었다. 꿈꾸게 하는 목표가 있었기에 2015년 여름 정읍 엄마와의 이별을 잘 넘어갔다. 2011년부터 시작된 투병과 이별의 시간 속에서 느꼈던 슬픔은 참으로 깊었다.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은 삶의 방향성과 함께 하는 친구들이다. 함께 걸어가는 친구들이 내게 있다는 것에 감사함을 배우기 시작했다.
뚜벅뚜벅 사뿐사뿐 한편으로는 조금은 게으르게 내 길을 만들어갔고 사람들과 함께 변화의 여정을 계속했다. 그 여정을 무한한 사랑으로 지지해 주었던 아빠와의 2019년 가을 이별을 맞이하는 과정과 그 후의 시간들은 내 마음에서 뭔가 이전과는 다른 어떤 것들을 만나고 있다. 2020년은 코로나 19를 비롯해 계획하던 모습이 아니라 내가 만들어온 삶의 패러다임, 생각의 한정들을 넘어 변화를 만들기로 결정하는 기회의 시간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터닝포인트는 완전히 무언가 완성된 순간이라기보다 조용한 결정의 순간에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