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의 경험을 정산해 보자
결정적인 순간은 늘 예상치 않게 다가왔다.
내가 백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도, 다시 일해야겠다고 생각한 순간도, 모두 그랬다.
그러고 보면 어째 간절히 바라는 것은 쉽게 손에 다가오지 않는 반면, 인생의 한 획을 긋게 되는 기회는 예기치 않게 마주치게 되는 것 같다. 뭐, 어쩌다 마주친 것 같은, 길에서 줍줍 한 것만 같은, 그 기회도, 사실 오랜 축적의 시간을 지나 만나게 되었겠지만 말이다.
지난 6월 나는 향후 커리어 패스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은 채, 무모하기만 해 보이는 백수의 길을 선택했었다. 그러고 나서 88일 만에, 역시나 계획에 없이, 그 길에서 조기 이탈했다. 88일. 3개월 남짓의 시간.
이 시간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한 시간이었다. 빠르게 지나치기만 했던 사람들을 내 인생의 트랙에 좀 더 가깝게 올려두었으며, 여행하며 낯선 곳에서 잠들고 눈뜨는 새로움을 느꼈고, 잠자고 있던 내 몸의 근육들을 단련하기 시작했고, 조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글과 영상으로 일상의 생각을 기록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해보자면, 88일 동안 나는,
24일 동안은 제주, 강원도, 강화도 등을 여행했고,
5일 동안 조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81회 분량의 넷플릭스를 봤고,
24회에 걸쳐 47명을 만났고,
13권의 책을 읽었으며,
9건의 브런치 글을 썼고, 5건의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했으며,
3개 병원에서 진료를 받아 1회는 간단한 수술을 했고,
10번 개인 PT를 받으며 운동했고,
3번의 낯선 모임과 클래스에 참여했다.
여러 모습으로 삶을 탐색했다. 머물며 여행하는 사람, 읽는 사람, 쓰는 사람, 케어하는 사람, 경험하는 사람, 시도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 기록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요리하는 사람, 선톡 하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 탐험하는 사람, 등등.
단순히 많은 경험을 했다고, 그 시간이 의미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아닌데, 유난히도 충만한 기간이라고 느껴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오랜 기간 일을 하다 한 없이 여유로운 시간이 충전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래 두 가지의 키워드가 그 의미였다고 생각한다.
바로, '예스'와 '연결'의 힘.
주변 사람에게 마음을 열어두는 것, 그리고 대화하고 공감하고 교감하는 것.
몇 년 전, 그 당시 나와 가장 친했던 사람이 내게 말했다. 짐 캐리가 나오는 '예스맨' 영화를 봤냐고. 봤다면, 그 영화처럼 단 일주일이라도 다른 사람의 제안이나 의견에 무조건 예스를 해보라고. 그 사람은, 그 당시 나에게 필요한 건, 무조건 예스, 예스, 예스! 다른 사람의 말을 포용해주는 것이라고 했고, 나는 그게 인생에 무슨 도움이 될까 회의적이었다. 오히려 '예스'라고 답할 때와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순간을 적절히 판단하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닌가 싶었다.
몇 년이 지났고, 2021년 6월 퇴사를 한 나는 어느덧, 어떤 사람이든 어떤 제안이든 대부분은 '네, 좋아요'로 말하는, 그 어느 때보다 '예스라고 답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백수 기간 동안 내게 쌓인 경험과 좋은 길로 나갔던 동력은, 모두 이 예스의 힘이었다. 예스라는 말,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방으로 열려있는 예스의 힘은 사실 어디로든 뻗어나갈 수 있으며, 심지어 우리의 상상 밖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걸, 나는 이제야 느낀다.
88일간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88일간 총 47명을 만났으니, 아주 단순히 계산하자면 이틀에 한 번 꼴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셈이다. (물론 한 번에 다 같이 만났거나 중복해서 만난 변수를 적용하지 않았으니 비약일 수도 있겠다.)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 다소 과장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지나고 보니 '찬란'이라는 단어로 압축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어떤 사람과 연결되고, 대화하고, 공감하고, 이해하는 일련의 과정들,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상호작용은 어찌 보면 찬란이라는 단어가 아니면 표현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쉼의 시간이 끝이 났고, 나는 백수 정산을 하면서 내가 놓치고 살아온 것들이 무엇인지, 나만의 다정함을 찾아나가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은 배운 것 같다. 이 시간이 나를 한 뼘 더 괜찮은 사람으로 인도했다.
그래서, 종합해 보면, 88일간 백수 결산,
경험 자산 플러스,
인생 자산 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