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한 사람, 한 번 해보려고
5년 정도 되었을까, 나는 30대 중반부터 '만만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젊을 시절의 또렷한 생각과 분명한 말은 '강함'이라는 개성으로 빛나지만, 똑같은 요소가 세월에 지남에 따라서는 나이만큼이나 부담스러운 벽으로 두껍게 쌓이겠구나라는 생각에서였을 거다.
만만한 사람이란 건 깔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냥 어떤 얘기든 쉽게 건넬 수 있는 사람, 무슨 얘기에도 나를 '평가'하지 않고 '본연의 나'로 봐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 그래서 편안한 사람. 그 편안함 위에 신뢰를 얹을 수 있는 사람. 이런 만만함은 나이와 직급이라는 두꺼운 벽을 깨부수는 힘이 있는 성질의 것이니, 나는 이 만만함을 갖고 싶었다.
와, 그런데 쉽지 않았다. 삼사십 년 넘게 살아온 본성과 특성이 있는데, 마음 한번 먹었다고 변할 순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곧 만만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지로 생각이 이어지면서, 다정한 사람이 돼보기로 했다. 다정한 사람이 되면, 만만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상냥함의 다정함이 아니라, 나의 성격이나 가치에 맞는 다정함. 그냥, 그걸 어떻게 정의하든, 나만의 '다정함'의 색깔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최근 나는 30대 중반과 비교해 더 다정하고 만만한 사람이 되어 나 자신이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아직 내가 원하는 다정함의 언덕에까지는 올라서진 못했지만, 잘 정비된 길을 따라 문제없이 쭉쭉 잘 올라가고 있는 중인 줄 알았다.
그런데 며칠 전 난관을 만났다. 나를 부담스럽게 느끼는 J에게, 그 이유를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같이 있으면 주눅 드는 느낌이 들어서요"
물론 나도 J가 늘 부담되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부담스러워하는 걸 잘 알긴 했다. 그래도 그렇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 샤워할 때, 잠들기 전에도 이 문장을 되씹어 봤다.
주눅 드는 느낌, 이라니. 나의 상사이고, 나보다 훨씬 뛰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잘 따르고 좋아하며, 여러 방면으로 재능과 매력이 있는 사람인데? 이건 뭔가 잘못된 것 같았다. 주눅이라니..? 이 무슨 당치도 않은 소리...!
내 삶의 목표치를 네비로 찍어두었었다면, 아마 그 지점에서 '삶의 경로를 이탈해 다시 안내합니다' 이런 안내 목소리가 나왔을 거다. 흠, 나는 다정한 사람, 만만만 사람이 될 건데..
한 번 해보기로 했다.
이 사람이 나를 부담스럽지 않게 내가 변할 수 있는지. 삶의 가치와 방식이 너무 다른 사람이라, 그리고 나 또한 솔직함을 못 참는 성향이라, 그 끝이 어떨지는 정말 잘 모르겠다. 그래도 한 번 해 보는 것과 그냥 다르다고 배제하는 것은 너무 큰 차이니까.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것이라고 믿고 싶다.
마침 듣고 있던 노래가 꼭 J 같아서, 이 가사 꼭 당신을 말하는 것 같다고. 9와 숫자들의 '드라이플라워' 노래 링크를 보냈다.
아무리 날 지켜내고 싶어도
창틀에 말려두진 말아요
향기와 색을 잃을 바에는
다시 필 날을 꿈 꾸며 시들게요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택시 안에서, '평정심'을 반복해서 들었다.
방문을 여니 침대 위에
슬픔이 누워있어
그 곁에 나도 자리를 펴네
오늘 하루 어땠냐는 너의 물음에
대답할 새 없이 꿈으로
아침엔 기쁨을 보았어
뭐가 그리 바쁜지 인사도 없이 스치고
분노와 허탈함은 내가 너무 좋다며
돌아오는 길 내내 떠날 줄을 몰라
평정심,
찾아 헤맨 그이는 오늘도 못 봤어
뒤섞인 감정의 정처를 나는 알지 못해
원래 마음공부가 제일 어려운 법이다.
나이 먹고서 안 하던 짓 하는 것도!
그건 그렇고, 새벽 2시다.
잠이 안 온다.. 살려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