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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Jun 24. 2021

퇴사자의 제주 여행

자유로워지는데도 연습이 필요해

이를테면, 바다를 건너야 했다.

무려 15년 동안을 회사원으로 비슷한 패턴으로 살았다. 일어나 출근을 준비하고, 사무실에서 한참을 일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리다, 다시 출근할 생각으로 잠을 청하는 일상. 1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루틴에서 조금은 멀어져 '다른 삶'을 살아보려면, 그러려면, 바다를 건너 보면 좋을 것 같았다. 물리적인 바다도, 심리적인 바다도 모두. 인생에서 한 번쯤은, 한 시기쯤은 다르게 살아보고자 했으니, 그 시작점으로 지금까지 내 생활의 반경보다 더 넓은, 강, 아니, 바다를 건너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열흘이었다. 내가 퇴사 직후 제주도에서 보낸 시간. 

바다를 건너자 생각 하나만 있었을 뿐, 어떤 계획이나 기대도 없이 제주도로 떠났다. 비행기와 숙소는 예약해 두었지만, 하루하루를 어떻게 채울지에 대해서는 가서 생각해 보자 했고, 그렇게 훌쩍 떠난 제주도에서의 열흘이 지났다. 사실 왜 퇴사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제주 여행을 갈까 싶었는데, 막상 떠나서 여행을 마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니 알겠더라. 제주라는 곳의 매력이 누구든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연습을 하는데 정말 제격이라는 것을 말이다. 퇴사 후 아무 생각 없이 관습적으로 떠난 여행은, 생각지도 못하게 마음을 가볍게 열어줬고, 내 심장이 말랑해져 작은 것에도 설렐 수 있게 있게 안내 해줬다. 우연히 만날 평온하지만 약간씩의 변주가 있는 일상을 기대하게 하면서 흔한 퇴사러의 제주 여행이 시작되었다. 




그래서였을 거야, 딱 나의 숨만큼만

제주 여행 사진을 올리던 내 인스타그램에 팀에서 인턴을 했던 후배가 댓글을 달았다. 구좌읍 종달리에 간다면, '종달리 746' 카페를 추천한다고. 문을 열고 들어서 카페 내 비치된 책과 여러 사람들의 감상평이 붙은 포스트-잍 노트를 보자마자 너무 설레었다. 평소에 읽어 싶었던 책들이 수북한 가운데, 사람들이 손으로 써 내려간 짤막한 감상평까지! 그림책이 큐레이션 돼 있던 섹션을 기웃거리다가, <엄마는 해녀입니다> 책을 읽어 내려갔다. 이 책에서 해녀 할머니가 뒤늦게 해녀가된 손녀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오늘 하루도 욕심내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있다 오너라

욕심부리지 말고, 딱 너의 숨만큼만, 딱 나의 숨만큼만. 객관적인 어떤 지표를 나타내는 어떤 기계도 없이 '숨'에만 의지하는 해녀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본인의 한계를 알고 여기에 맞춰서 바닷속을 드나드는 것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퇴사를 한 이유도 여기까지가 딱 '나의 숨'이어서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멈추고 바다 위로 올라가야 하는 시점임을 나 자신은 알았던 것은 아닐까. 문득 나의 퇴사가 너무 무모해서 후회할 것 같다거나,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한다는 감정이 올라오려고 할 때, 그럴 때마다 이 문장을 되뇌어봐야겠다. 여기까지가, 거기까지가, 나의 숨만큼 이었으니까. 딱 나의 숨만큼만. 욕심부리지 말고. 


그렇게 그림책에서 만난 한 문장이 나의 여행길에 따뜻한 위로가 되어 들어왔다. 



시간은 내 손안에 있는 걸! 바람처럼 느긋하게 방랑할게 

열흘의 절반은 제주의 서쪽, 나머지는 동쪽으로 숙소를 잡았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최소 2번 갈아타고 버스 시간만 약 2시간~2시간 30분이 걸리는 머나먼 길이었는데, 카톡으로 친구에게 이를 얘기하자 친구가 이렇게 얘기했다. 

어흑 2시간. 야 그냥 택시 타라

훗, 세상에, 내 친구는 이제 내가 시간을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나 보군, 하고 생각했고 혼자 미소를 지었다. 와 이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나는 세상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한 없이 자유로운 시간을 충전해서 제주를 왔으니, 2시간쯤이 문제가 될 리가 없었다. 


어느덧 제주도는 나를 능력자로 만들어줬다. 

바람처럼 느긋하게 방랑할 수 있는 능력자. 




고작 방명록인데, 갑자기 뭉클... 삶은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무게를 견디는 것

1인실을 중심으로 운영하는 하도리의 작은 게스트 하우스에 묵는 날, 밖으로 나가기 전에 습관처럼 방명록을 훑어보다 예상치도 못하게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방명록만 읽어 버렸다. 가장 최근 방명록부터 과거로 회귀해 한 장 한 장 살펴보는데, 뭉클해지는 지점들이 꽤 많아서, 한참 이 숙소에 머물었던 사람들의 스토리에 빠져들다가, 누군가의 아픔이나 상실에 왈칵하다가, 그러다가 다시 제자리를 찾아 돌아오는 지점의 언어에 심장이 말랑해졌다. 예를 들면 각자의 사정과 이야기들이 결국은 아래와 같은 이런 얘기로 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감사하다'

퇴사러들의 숙소 맛집이라고 불린다는 곳이어서 더 그랬을까. 너무 많은 일들이 한 번에 본인에게 찾아왔는데, 조용한 숙소에 머물며 생각을 정리했기에 여기 머무는 모든 사람들이 다시 안정을 찾았으면 좋겠다는 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의 한 구절을 나누며 본인의 여행 이야기를 남긴 사람, 커다란 공허감에 이곳을 찾았지만 다음에는 꼭 행복한 미소로 채워서 오겠다는 분, 제주도 비건 맛집을 추천하며 '고통 없는 식탁'을 권하는 글,  흥이 많은 사람이라 제주 여행하면서 들으면 좋을 만한 음악을 추천해 둔 사람, 가끔 슬프고 자주 행복하라는 마무리 글. 와, 정말 어떤 에세이를 읽는 것보다 울림이 있는 글들이었다. 


누구나 다 한번쯤은 길을 헤매지. 

우리는 그 길 위에서 각자의 몫의 무게를 지탱하며 살고 있고, 

이를 견디는 태도, 상대방과 나누는 에너지, 세상의 영감은 스스로 마음먹기 나름이겠지.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 묵는다는 것, 이 공간을 스쳐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 재미있고 값진 것일 줄 몰랐다. 대부분의 글들은 신기하게도 무게감에 눌려있지 않고 스스로의 길을 풀어나가더라. 




모르는 사람에게 웃으면서 말 건다는 것

나의 엄마 또래, 5-60대 아주머니들이 모르는 사람들에게 쉽게 바로 말을 거는 것이 신기했던 적이 있다. 앞뒤 맥락도 없이 다가가서 쓱- 말을 걸고 얘기를 나누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쓱- 서로 갈 길을 가는. 


평소에는 '뭐야?' 했던 이런 일들도, 혼자 여행을 가면 다르게 다가오기 마련이다. 낯선 사람의 짧은 다정함이 유난히 따뜻하게 다가오곤 마법. 이번에 혼자 떠난 여행에서 몇몇 사람들을 만났는데, 버스를 기다리는 오솔길에서, 안개로 투어가 취소된 날의 거리에서, 늦은 밤 뒤늦게 밥을 먹기 위해 들어선 레스토랑에서, 그리고 유쾌한 사장님이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예를 들면 이런 식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다. 

"혹시 비자림 가시나요?"
"저기요, 저희랑 같이 해변에 가실래요?"
"엇, 아까 뵈었었는데, 같이 밥 먹을까요?"
"옥수수 좋아하세요? 사과 좀 드시겠어요?" 
"민희 씨, 이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 어떻게 왔어요. 여기 수건 줄게요."

특히 나는, 비자림을 가기 위해 환승 버스를 기다리던 오솔길에서 말을 걸던 대학생의 표정은 유난히 기억이 난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평소의 나도 보통 저렇게 유쾌하게 표정을 지어며 얘기했었던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철갑을 두른 듯한 표정으로 툭툭 말을 뱉어버릇 했었는데..  


모르는 사람에게 유쾌하게 말을 건다는 것, (*아니 모르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잠깐 스치더라도 해 볼만 하다는 것. 



안 가는 사람 없는 섬, 제주.

저, 퇴사하고 왔어요, 라는 말이 신기하게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여겨지는 곳. 

심장이 조금은 더 말랑해지고 표정이 부드러워져서 조금은 다른 관점으로 휴식기를 마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나, 퇴사하길 참 잘한 것 같다. 

제주도를 다녀오길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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