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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Jul 06. 2021

잠시만요, 월급 대신 사람이 좀 지나갈게요

퇴사 후 일주일, 그 간 만난 사람들

퇴사를 했기에 회사에서 주는 안정적인 월급이 나를 무심코 스쳐 지나갈 일도 이제(*당분간) 없지만, 대신 다른 사람들을 지나다닐 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진 느낌이다. 월급이 차지하던 묵직한 자리를 뻥- 하고 저 멀리로 차 버리고 보니, 다른 사람으로 진입하는 길들이 더 넓어지고 다양한 갈래로 갈라지면서 세상이 확장된 느낌이랄까. 


그간 일하면서 스쳤던 사람들은 퇴사를 하고 나서도 여전히 내 인생의 트랙 어딘가에서 만났고, 내가 일하면서 생각보다 좋은 사람들, 영감을 주는 사람들, 활력을 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구나 싶었다. 내 삶에서 직장이 빠져나가고 여백이 커진 후에야 느끼게 된 인연의 귀함, 고마움에 대한 기록이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의 다정함

지난 몇 년 동안 종종 미팅과 전화로 연락을 했던 A기자와  퇴사 후 일정으로 점심 약속을 잡게 되었다.  점심 약속까지는 좋은데, 하필이면 퇴사 이후에 시간을 내야 한다니... 그렇게 점심을 약속을 잡았고, 나는 퇴사 후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A기자는 점심 약속 장소에 들어서자마자 물었다. 

아니 어쩌다가 왜 퇴사를 하는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요?


도비는 이제 자유인데, 이미 자유의 몸인 상태로 이 미팅을 나가야 할지 말지 마음의 동요가 일지 않았었다면 사실 거짓말인데, 밥을 먹고 나니 나가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안부를 묻고, 말 한마디 챙긴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까. 특히 밥 한 번 먹자는 말, 실제로 밥을 먹는 시간을 남겨둔다는 것, 그건 정말 상대방에게 감사해야 하는 일이니까.



당신의 사려 깊은 말, 언어의 온도 

퇴사 일주일 전쯤이었을까, 난데없이 커피 기프티콘을 받았다. PR 에이전시에서 일을 했기에, PR 관점에서 고민이 있는 기업 담당자들과 연결이 되곤 하는데, 몇 년 전인가 연결된 적이 있는 B 부장님이었다. 예전 메일을 정리하다가 예전에 도움받은 일이 생각나고 친절하게 대해줘서 고마웠다는 메시지와 함께였다. 


이 메시지가 계기가 되어 퇴사 후 B부장님과 식사를 했다. 맛있는 초밥에 따뜻한 커피까지 얻어마셨다. 유선으로만 인사를 했지 대면으로는 처음이라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한 번 만나 식사를 했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는 나의 무심함을 또 한 번 실감했다.(ㅠ.ㅠ) B부장님은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무척이나 섬세한 분이었고,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과 교류하는 것은 단지 시간의 문제는 아닌가 보다 라고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 B부장님이 이렇게 메시지를 주었다. 


제가 오늘 너무 받은 게 많네요. 부장님 넘 똑똑&매력적이세요.
어디선가 보석 같은 부장님을 알아보고 아주 비싸게 모셔갈 거예요


나는 정말 드린 것이 없었고, 오히려 잘 얻어먹고 왔는데, 참으로 다정한 말. 내가 실제로 얼마나 똑똑하고 매력적인가와는 별개의 문제로 말이다. 누군가를 위해 마음의 응원을 보내준다는 것, 따뜻하고 다정한 말의 힘은 생각보다 셀 수 있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저마다의 다정함 

이번 퇴사는 내 인생 두 번째 퇴사. 첫 회사는 1년 8개월 만에 퇴사를 했었고, 이번 두 번째 회사는 약 14년을 다녔다. 짧게 근무했던 첫 회사의 나의 사수였던 C팀장님을 만났다. 15-16년 전, 꼬꼬마 시절의 나를 기억하고 얘기 나눌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었는데, C팀장님이 커피와 빵을 사면서 대파 빵을 고른 나에게 무심하게 툭툭 말했다. 

빵 더 먹어. 여기 이거 맛있으니까. 이것도 먹자.
잼? 잼 하나 살래? 어떤 맛으로 할까? 이거 집에 가져가 


잼이 먹고 싶다고도 안 했는데, 뭔가 순식간에 진행되어 '얼그레이'라고 답하고 나니 얼떨결에 손에 잼이 들려있었다. 음, 잼이 생겼네....? 


15년이 지나도 여전했던 건, C팀장님의 시크한 매력. 무심한 듯 툭툭. 아 맞다, 잊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첫 번째 회사에서는 이런 감성, 쿨함, 시크함 대세였었다. 다정함의 모습은 저마다 다르고, 오늘은 얼그레이 잼에서 시크한 다정함을 느꼈다. 




퇴사 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간 서로 바빠 만나지 못했던 사람, 새로운 인연이 되어 연결된 사람, 그간 무심하게 대했던 사람 등등. '프리랜서를 해볼까 봐요'라는 나의 막연한 말 한마디가 새로운 사람과의 미팅으로도 이어졌고, 기자를 하다가 PR 업무로 전향한 분과의 느슨한 만남도 있었고, 오랜만에 대학 시절의 선배도 만났다. 


약 16년 간의 회사 생활. 그간 직장 생활이 내게 남겨준 것은 적립된 퇴직금 외에도, 가장 큰 것은 결국 사람이었구나 싶다. 그것이 아주 친밀한 인생 친구가 아니더라도, 느슨한 만남이라도 큰 의미가 있다는 것, 오늘의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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