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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Jul 12. 2021

퇴사러의시간은 빠르게 흐른다

퇴사 후 한 달이 지났다

퇴사 후 말 그대로 '먹고 놀기' 시작한 지 한 달째, 

반찬을 가지러 본가에 갔더니 엄마가 물었다. 


회사 안 가니까, 시간 금방 지나 가지? 
응. 하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은데도, 진짜 시간은 정말 잘 가네


회사를 안 가면, 시간이 더디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그냥, 너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동안, 나의 20대와 30대 대부분의 시간은 아침에 부랴부랴 출근을 하고, 정말 수많은 일들이 나의 하루를 꽉 채워 저장 용량이 초과되거나 에너지가 고갈되고 나면 퇴근을 하기 마련이었으니까, 일상의 척추 격인 회사의 시간을 내 인생에서 빼 버린다면, 오로지, 그 많은 일들을 처리했던 시간들만 고요히 남아 천천히 더디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머나, 그런데, 정작 '먹고 놀아'보니, 그게 아니더라. 

직장의 일로 채우지 않는 하루하루는 여유로웠지만, 직장을 다닐 때만큼이나 시간이 더 빠르게 흘러갔다.  차이가 있다면, 나를 위한 시간이 꽤나 많이 늘었다는 것, 하루가 빠르게 채워지며 바쁜 긴 한데 동시에 여유롭기도 하다는 것. 


심심할 틈 없이 하루가 잘 지나간다는 것에 대한 불만은 없었으나,  '하는 게 별로 없는데도' 시간이 잘 가는 느낌은 뭔가 꺼림칙했다. 나 자신을 푸시할 강요된 목표나 데드라인 없는 한량의 삶은 너무 좋기도 하지만, 손을 한껏 펴고 모래를 움켜쥐고 있는 느낌이랄까, 분명 뭔가 빠르게 지나갔는데, 손을 들여다보니,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은 것 같은... 


'먹고 논다고' 해서 남는 것이 없다는 건 이상한데... (*물론 무언가가 남아야 한다는 생각조차 강박일 순 있지만 ) 퇴사 후 한 달간, 하루를 채워나갔던, 일들을 정리해봤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보를 반듯하게 정리한다. 

집 청소를 한다. 테이블을 정리하고, 바닥을 치우고, 가끔씩 먼지도 턴다. 

사람들에게 연락해 점심 또는 저녁 약속을 잡았다. 만나서 사람에 집중해 대화를 한다. (*이제는 급한 메일을 보거나 전화를 받을 일도 없다. 현재만 있을 뿐.) 

여행을 떠났다. 낯선 공간, 새로운 사람, 맛있는 음식, 그 지역의 바람과 공기를 즐겼다. 특히 북 스테이가 너무 좋았다. 

새로운 루틴을 만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한 시간 남짓 여유로운 남산 산책, 달리기 등. 

배달음식 대신 보글보글 밥과 반찬 조촐한 한 상을 차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PT를 시작했고, 무심히 방치해 두었던 근육을 자극하기로 했다. 

병원을 예약했다. 무심한 주인이 모른 척해서 더 아우성 되던 위와 손목을 위해.

유튜브 대신 책을 보기 시작했다. 짧은 영상의 호흡이 아닌, 긴 텍스트의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렸다.

내가 느낀 생각, 경험한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가계부를 쓰며 내 삶의 비용을 알아보고 있다. 


회사 말고 나로 수렴되는 일상, 인생에 한 번쯤 나를 위한 루틴으로 살아본다는 것에도 의미가 있지

회사를 다닐 때는 회사 출퇴근 시간과 일의 양에 따라 내 일상의 모든 것들이 달라졌다. 

아침은 시끄럽게 울려대는 몇 번의 알람을 억지로 무시하며 잠을 조금이라도 더 자다가 도저히 넘길 수 없는 때가 되어서야 후다다닥 일어나서 회사로 뛰어갔고, 밤은 미루고 미루다가 도저히 이젠 안 되겠다 하는 시점에 대충 꼭 해야만 하는 일만 해 치우거나, 하고 싶은 일을 빠르게 해치우고 내일의 출근을 준비하는 때였다. 


퇴사 후, 이 시간의 중심이 나로 바뀌었다. 

아침에는 눈이 떠지는 시간에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고(*신기하게도 8시 전후로 저절로 눈이 떠지더라), 일어나자마자 침대 이불을 정리한다. (*내게는 이 간단한 일이 마음의 여유를 상징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후 모자 하나 푹 눌러쓰고 남산을 올라가서  한 시간 반 가량 숲이 주는 또 다른 질량과 밀도의 공기, 이마와 목 사이를 흐르는 땀을 느낀 후, 집으로 와서는 기존에 익숙지 않았던 근육의 당김을 조금씩 좋아해 보려 노력해본다. 땀 흘린 후 씻은 후의 개운함을 느끼다가, 빨래를 하고, 조촐하게 밥을 차려 먹거나, 점심 약속을 향한다.


 그간 잘 만나지 못했던 또는 여유롭게 만나지 못했던 누군가와 만나 대화를 하고, 이 약속이 한 시간 내외의 거리면 급한 일이 없으니 두 다리로 걸으며 짧은 도보여행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와 청소를 하고 설거지를 하고, 어질러진 책상을 정돈한다. 카페를 가기도 하고, 넷플릭스를 보다가, 책을 보다가, 브런치를 펴놓고 글을 쓰겠다고 낑낑되다가 보면 어느새 밤이다. 


어라, 내 하루가 또 어떻게 지나간 거지? 

나 자신이 중심이 되는 소박하고 소소한 일상이 이렇게 시간을 많이 할애해야 하는 일이었다니. 

내가 원하는 시간에 서두르지 않고 할 수 있는 만큼 충분히 시간을 들여 나를 위한 운동을 하고,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여 내 몸에 들어갈 밥을 차려 먹고, 내가 사는 공간을 정리한다는 것. 요기까지만 해도 반나절 이상은 그냥 지나간다는 것을 그 전에는 알지 못했다. 새롭게 정리되고 있는 하루의 루틴은 회사를 다닐 때의 내가 시도하지 못했던 나를 위한 건강한 습관을 선물해 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야지 

회사 생활을 하면서(*약 16년간) 맛보지 못했던 평온한 일상을 한 달쯤 맛봤으니, 이제 나의 미션은 '나태해지지 않기'이다. 아무리 좋은 평온한 시간도 어떤 목표 의식 없이는 나태 지옥으로 빠지기 마련이니. 이제부터는 휴식기의 또 다른 스테이지로 넘어가 봐야 할 것 같다.


근데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

저기요, 이 쪽이 맞나요? �


누구나 그러하듯, 언젠가는, 길을 찾아 나아가겠지. 언제나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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