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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Sep 12. 2022

95km를 운전해 사주를 봤다

사주가 뭐라고...

"민희 씨,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되냐면, 일단 들어가서 앉으면 돈이 쌓여 있을 거야. 거기에 돈을 내. 앉아서 생년월일시를 적어내면 이제 시작이야. 큰 흐름의 스토리가 읊어져 나오는데 흐름을 방해하지 말고 녹음을 해. 알겠지?"


약 12년 전쯤, 저 먼 전남 고흥 나로우주센터에서 처음 만났던 기자님이 있다. 이후 몇 년에 한 번씩 소식을 주고받았고, 그때마다 종종 들었던 주제 중의 하나는 흥미롭게도 '사주'. 와이프 분과 함께 연례행사로 사주를 본다고 했고, 이를 차곡차곡 기록해서 나중에 시간이 지난 후 들어보는 것이 재미있는 일 중 하나라고 했다.  


"그때, 그 사주 카페요, 어딘지 알려주시겠어요? 한 번 가보려고요"

지난달 기자님과 식사를 하던 날, 마침 나는 마음이 좀 많이 답답한 상태가 계속되고 있었다. 카톡으로 '춘천 고고씽'으로 제목이 붙여진 pdf파일을 받았다. 1번 사주 카페 정보와 함께 큼직한 글씨로 '전화 예약 필수'라고 되어 있었고, 2번부터는 주변 관광 코스 안내 마냥 막국수와 카페 정보가 이어져 있었다.


사주를 믿는 건 아니었다. 결론이 나지 않고 빙빙 돌고 있는 상황을 누군가에게 판단받고 싶었던 것뿐. 나를 아는 사람들과는 많이 얘기했으니, 나라는 사람이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사람이면 좋겠다 싶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리겠거니 했다. 물론 한 친구는 춘천까지 사주 카페를 찾아가는 고민이라면 결론이 뻔하지 않냐며, 그것 자체가 결정이 난 거라고 한숨을 쉬었지만 말이다.


"사주가 운명을 결정해 주는 건 아냐. 내 운명은 내가 결정해야지. 그냥 어드바이저로 생각하면, 굳이 마다할 필요는 없잖아? 나의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엉뚱한 시선의 이야기를 듣는 게 재미있는 거야. 예를 들면 사주에서 '비행 잘할 것 같은데?'라고 들었다고 치면 관심도 없던 비행기에 관심을 갖게 되잖아. 그냥 듣고 믿는 게 아니라, 듣고 노는 거야. 그리고 춘천 막국수 하나 시켜먹으면서 녹음한 걸 들으면서 낄낄낄 껄껄껄 재미있게 되새기다가 와."


안 가던 사주 카페를 간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이곳을 소개해 준 기자님의 당부를 한 번 더 듣고, 목표한 춘천 사주 카페까지 95km를 달렸다. 평일 휴가를 냈고, 할 일도 없는데, 재미있는 경험일 거야 합리화하면서. 굳이 고속도로로 가지 않아도 될 만큼 여유로우니, 음악을 틀고 국도를 달렸다.


그렇게 춘천에 도착했고, 사주 카페에 들어갔다.

"여기 생년 월일, 어디 볼게요" 오 이제 시작이었다.


"**년도 **분 *시에 태어났고, ***, *** 꼭 해야 하고, 북쪽으로 가면 안 돼요. 관운이 있어요. 능력이 있는 사주예요. 무조건 일을 하시고요, 보수적이고 반듯한 성향을 가졌고, 늦게 혼인하는 게 좋고, 작년이 좀 힘들었고.. 그게 올해 초까지 왔었네요. 올해 운이 다시 들어와요. 4가지 복이 동시에 와요."


대기만성, 뭘 해도 잘 된다는 마냥 기분 좋은 얘기를 한참을 듣다가, 드디어 궁금한 걸 물어볼 타이밍이 왔다.

나: "저.. 이러저러한 고민이 있는데 결정을 지금 해도 될까요?"

사주 봐주신 분: "뭐할라고? 공부하려고요? 공부할 거면 그렇게 결정해도 됩니다"

나: "아뇨(단호)"

사주 봐주신 분: "그럼, 왜? 굳이?"

나: "...."


반듯한 사주라고 칭해주셔서 너무 좋고 재미있긴 했는데, 아니, 근데 내가 여기 왜 왔더라.

마음속 깊이깊이 품고 온 내 고민은 그럼 어떻게 하지...? 한 마디밖에 못했는데...


에라 모르겠다...

일단 고민 따위 옆으로 치워두고, 춘천에 간 김에 지인을 만나 맛있게 막국수를 먹었다. 막국수와 수육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다음을 기약한 후, 그녀가 소개해 준 의암호 옆을 따라 드라이브를 했다. 서울로 돌아왔고, 후배 집에 가서 늘 똑같은 얘기를 또 늘어놨다.


사주가 나에게 남긴 것. 왕복 190km의 드라이브와 나는 잘 될 것이다라는 내 인생 전체의 자기 최면.

이 정도면, 당장의 고민은 해결하지 못했으나 (사실 해결될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잠깐의 휴식과 여유는 되찾은 것 같다. 이래서 '춘천 고고씽' 파일이 존재했던 것인가.


사실, 그날 밤 천명 앱을 통해 타로카드도 봤다는 건 안 비밀. (그건 그렇고 천명 신세계 +_+)

그런데 어쩜 이리 똑같이 나오지. 이 분도 "왜? 그러지 마요.  어떤 결정을 해도 괜찮긴 해요. 근데 왜 굳이?" 이 분들이 사주를 보고 운만 본 것이 아니라, 사실 내 목소리와 표정에서 마음과 감정을 읽고 얘기를 해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주 카페를 향한 긴 드라이브는 이렇게 싱겁게 끝났다. 고민은 그대로였지만, 마음속에 여유는 살아났다. 내 고민은 결국 내 인생의 기준에 따라 내가 풀고 결정해야 하는 것. 그 책임도 내가 져야 하는 것. 그것뿐.


그냥, 참 재미있는 하루 나들이였네. 껄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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