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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의계절 Sep 05. 2023

퇴사와 백수, 그거 해 보니 어떤데

경력 휴지기 중간 회고 

치밀한 계획 하에 백수 생활을 시작한 건 아니었다. 다시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내겠지 하는 나 자신에 대한 막연한 믿음이 있었고, 책과 사람을 통해 인풋의 시간을 늘리고 싶다는 생각이 전부였다. 뭐, 한쪽 문을 닫으면 다른 쪽 문이 열리겠지 싶었고, 그게 아니어도 결국은 뭐라도 되겠지 싶었다. 


비움일지 채움일지 알 수 없는 나의 경력 휴지기는 빠르게 흘러갔다. 퇴사했던 겨울의 끝자락은 봄과 여름을 지나 이제는 가을을 마주했다. 계절과 함께 쌓인 시간들은 어느새 6개월을 가리켰다. 처음에는 출근하지 않는 삶이 어색하고 낯설었다. 온전히 갖는 내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지 영 서툴렀다. 바쁘게 지내려고 동동거리다가도, 나태함이 찾아왔다. 어느 순간 내 하루를 무언가로 꽉 채워야 한다는 강박마저도 사라졌다. 


백수 생활은 내게 무엇을 남길까, 일이란 내게 어떤 의미 였을까, 백수 생활을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했다. 


일이라는 불확실성이 제거된 일상, 답을 찾아가는 재미도 사라졌다 

나심 탈레브는 '불확실성과 무작위성이 없는 삶', 그래서 '날마다 벌어지는 일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면 내 삶은 죽도록 지겨울 것'이라고 했다. 


백수로 3개월이 지나자, 평온한 일상은 참을 수 없는 지루함으로 점철됐다. 어떤 변수도 없이 평화롭게 흘러가는 시간은 행복했지만, 꽤 따분했다. 내게 일이라는 롤러코스터는 생각보다 큰 동력이었다. 나는 탐험을 하고 싶은 사람인데, 그저 관광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각 사람마다 그 사람의 인생에 불확성과 무작위성을 부여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거다. 일이 그 전부는 아닐 테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일이 삶의 다이내믹을 만드는 큰 요소였다. 시도하고 도전하면서 그 안의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은 그저 돈벌이로만 그치는 것은 아니다. 지지고 볶고 살아야 사는 맛이 있는 것처럼, 아무리 일이 지긋지긋한 할지라도 그 안에서 길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분명 우리가 의미있는 일 중 하나일거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며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마주한다 

모든 것들이 새롭다. 요리를 했는데, 너무 맛이 없다. 청소를 하는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잘 해낸 집안일이 내 하루를 빛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수영을 배우면서 내 몸의 힘을 빼고 지속한다는 것의 어려움을 느낀다. 달리기를 시작했고, 숨이 차오름에도 계속 해낸다는 것의 가치를 어렴풋이 알겠다. 풋살을 해봤다. 팀 스포츠에서 연대의 의미가 뭔지 조금은 알겠다. 손도 대지 않았던 비즈니스, 금융, 과학 등의 분야의 책을 읽으면서 내가 얼마나 무식하고 좁은 시야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백수의 시간은 한 지점에 고정된 눈을 돌려볼 수 있는 기회다. 한 곳에 오래 머물렀던 관심을 나를 둘러싼 다양한 세상으로 돌려본다.  내가 얼마나 무지하고 무식한지 계속 깨닫게 되는 시간의 연속이다. 이 맛을 왜 이제 알았을까 싶은 분야와 영역이 너무 많다. 나라는 사람은 작고 또 작아지지만, 알지 못했던 낯선 세계로의 진입은 여전히 흥미롭고 재밌다. 


재평가의 시간은 늘 다가오고, 결국은 사람이 남는다. 

회사와의 작별은 사람의 이별과 매한가지다. 설레었다가, 한참 빠져 있다가, 마음이 돌아서고, 마침내 이별을 고한다. 한참 그 관계의 정중앙에 있을 때는 총체적인 시각을 갖기 어렵다. 진실은 하나지만, 관점에 따라 파생되는 상황은 수백 개다. 퇴사와 이직은 보지 못한 조각각들을 맞춰 볼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시간을 흘려보내고 난 후, 그때에만 어떤 해석이 옳았는지 알 수 있는 법이다. 


일을 할 때든 아니든 분명한 것 하나는, 결국에 남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일을 매개로 만난 사람들은 퇴사 후에도 남는다. 어떤 성취물보다 오래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들, 이것 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까. 다시 일을 할 때도, 일에 매몰되어 사람을 잊는 과오를 범하지는 말자고. 



해보니까, 백수도 잘하려면 계획이 필요하다. 돈만큼이나 쓸 데가 없는 게 시간이다. 시간을 쪼개고 쪼개 흩날렸다가는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집중할 수 있는 한 가지의 목표가 뚜렷한 편이 좋다. 마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또 다른 시각을 겟할 수 있다. 여행 그까짓 게 뭐가 그렇게 의미가 있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을 바꾸니 결과도 달라지더라. 우리 안에서 관점은 종종 굳어있기 마련이다. 달라지려면 필요한 건 오픈마인드뿐이다. 무엇이든 새롭게 시작하기 좋은 때다. 그 어떤 것도 처음 시작할 때는 시간이 필요하다. 용기도 에너지도 있어야 한다. 백수의 시간은 무엇이든 새로운 걸 시도해 볼 때 특히 더 빛난다. 인간관계의 바운더리를 넓혀보는 것도 좋다. 그간 고정되었던 삶의 경계를 넘어보기 좋은 때다. 새로운 모임에서 기존의 '나'와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는 것도 세상을 넓히는 좋은 방법이다. 기록하지 않는 모든 것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내가 읽고 보고 경험한 모든 것들은 되짚어 보지 않으면 깊이 깨닫기 어렵다. 스쳐 지나갈 뿐 축적되지 않는다. 



아, 그래서 백수 탈출은 언제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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