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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지학개론 Jul 13. 2021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를, 보릿골 인어공주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원작 '인어공주'의 스토리를 소재로 각색한 이야기입니다.

음, 드라마적인 요소를 좀 담아보고 싶어 나름 욕심을 냈지만... 아무래도 전문가가 아니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감정이나 상황에 적절한 표현이 많이 부족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실제 이야기와 완전 다름이 있으니 혼돈하시지 마시고 재미있게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공주야, 아침상은 아직이니?"

어려서 엄마는 돌아가셨고 아빠와 단 둘이 살고 있으며 내 이름은 '인어'다. 특이한 이름이었기에 누구든 한 번만 들어도 잘 잊지 못하는 그런 이름.

아빠는 내 이름에 공주를 붙여 '인어공주'라는 애칭도 만들어주셨다.

"공주야, 아침밥은 다 됐냐고?"

"네! 다 됐어요."

아빠와 함께 아침을 먹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밥상을 준비하고 있다. 어딜 급하게 나가셔야 한다는 말에 서둘러 아침을 준비하다 보니, 실수 투성이었다.

"숟가락만 가지고 오면 어쩌냐? 젓가락은?"

"아참, 제가 정신이 없어요."

"젊은 녀석이... 쯧쯧쯧."

식사를 하시던 아빠가 내게 말한다.

"인어야, 오늘 우리 보릿골에 서울에서 손님들이 오신다는구나."

"손님요?"

"작년부터 마을을 살려보자고 관광객을 초대하고 있잖니. 손님 두 분이 오신다는데 내가 그분들 픽업을 가야 하거든."

"아~"

우리 마을은 너무 외진 산골에 있다 보니 일반적으로 관광지가 될 수 없었다. 마을 이름도 정감 있는 보릿골이고... 하지만 마을을 살려보자는 취지로 도시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오늘 찾아오는 분들은 그 수혜를 받는 첫 손님들이었기 때문에 마을에선 더욱 신경을 써야 했다.

식사를 모두 마치신 아빠가 손님을 태우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나가신다. 조심히 잘 다녀오라며 아빠를 향해 힘껏 손을 흔들어 본다.

"두 분은... 과연 어떤 분들일까?"

산길을 따라 점점 작아지는 아빠의 자동차를 바라보며 오늘 찾아오는 손님들이 궁금했던 차, 갑자기 뭔가가 내 머리에 떠오른다.

"앗, 맞다! 어제 계에 어항을 놨는데 뭐가 잡혔으려나."

밥상도 치우지 않고 서둘러 산속에 있는 계곡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전날 비가 제법 내려 계곡물이 살짝 불어났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기에 작은 폭포 아래 어항을 설치해 두었다. 비가 내린 다음날 많은 물고기가 활발하게 움직이기 때문에 큰 물고기가 잡혔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면 우리 동네 계곡은 그 어느 유명 계곡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다. 어릴 적부터 자주 찾아가 수영도하고 물장구도 치던 곳이다.

계곡 가운데 웅덩이로 드러 서려할 때 평소 없었던 팻말이 하나 보였고 팻말에는 숫자 '1'이 적혀있다.

"1? 이게 뭐지?"

뭔지 잘 몰랐지만 크게 중요한 것 같지 않아 계곡 앞에 있던 팻말을 숲 뒤로 던져버렸다. 팻말 뒤편에 적혀있던 글자는 보지도 못했다.

어항을 꺼내기 위해 웅덩이로 몸을 던졌지만 너무 시원한 계곡물에 어항은 잠시 잊고 혼자 수영을 즐기게 되었다. 그렇게 얼마나 수영을 했을까. 물 밖으로 나온 나는 바위에 몸을 누인 채 화창한 하늘을 바라보며 기분 좋은 풀 냄새와 선선한 바람에 취해 그만 잠이 들었다.

"맴맴맴~"

오래 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짧게 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잠에서 깬 것은 시끄럽게 울어대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원인이었지만 또 하나의 시끄러운 소음도 한몫했기 때문이다.

"하하하!"

"물이 얼음장이네, 여기 완전 최곤데?!"

처음 듣는 두 명의 남자 목소리가 시끌벅적 들려왔고 잠에서 깬 나는 몸을 일으켜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움직여본다.

"누... 누구지?"

처음 본 사람들이 물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서로에게 물을 뿌리며 계곡물이 얼음장 같다는 말과 함께 신나게 놀고 있는 모습이다. 그들이 노는 모습에 처음 목적이었던 어항이 있는 곳으로 눈이 향했고 설마 저 두 명이 어항을 발견하고 잡힌 물고기를 가져가는 것은 아닐까 조마조마했다.

그런 걱정을 하고 있던 중 때마침 한 남자가 내가 설치한 어항을 발견하곤 일행에게 말을 건다.

"어? 저기 물속에 뭐가 있는데? 반짝이는..."

"보물인가?"

"에이, 설마. 무슨 병 같은데... 쓰레기인가?"

"그런데 웅덩이를 지나야 갈 수 있어. 난 수영 못해."

"그래서?"

"난 수영 못해. 그러니 발견한 네가 가서 가지고 와."

"나도 수영 못하는데..."

두 남자 모두 수영을 못한다며 서로에게 내 어항을 꺼내오라고 다투기 시작했고 어쩔 수 없이 처음 발견한 남자가 어항을 꺼내오기로 한 모양이다.

"야, 나 수영 진짜 못하니까 만일 허우적거리면 밧줄이라도 던져."

"에릭, 걱정 마. 나 해군 출신이잖아."

"그런데 수영은 왜 못해?"

"해군 출신이라고 다 수영 잘하는 줄 알아? 그건 편견이야!"

물로 들어가는 남자의 이름이 '에릭'인 모양이다. 수영도 못한다면서 나름의 자존심을 세워가며 웅덩이로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웅덩이의 수심이 깊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행여나 사고라도 날까 두근두근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에릭! 아직까지 수심은 괜찮지?"

"어, 아직은 걸어갈 만 한데 점점... 윽!"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에릭이라는 남자는 깊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했고 뭍에서 이를 지켜보던 남자는 놀라 어쩔 줄을 몰라한다.

"어푸~ 어푸!"

"에릭, 왜 그래?! 빠진 거야?!"

긴급한 상황이었다. 뭍에 있는 남자는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고 물에 빠진 에릭은 물속으로 잠겨가기 시작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휙~ 풍덩!"

내가 몸을 던져 허우적대는 에릭의 머리채를 잡고 수면 위로 올라왔지만, 에릭은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다.

뭍으로 에릭을 끌고 나온 나는 숨은 쉬고 있는지 코에 내 손등을 올려본다. 차갑다. 호흡이 없는 상태다.

"아... 아가씨, 어디서 나타나신 거예요?"

어디선가 나타난 나의 행방을 묻는 일행에게 나는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어서 마을에 가셔서 어른들을 모셔오세요! 빨리요!"

"아... 알았어요!"

남자는 쏜살같이 달려 마을로 향했고, 나는 쓰러진 에릭과 계곡에 남게 되었다.

물에 빠져 호흡을 하지 못하는 사람을 살려내기 위한 방법을 예전에 배웠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처음 본 남자의 입술에 내 입술을 대야 한다는 것이...

"힝~ 나 처음인데... 내 입술..."

점점 하얗게 변해가는 에릭의 얼굴을 보자니 순정, 순결이란 말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에릭의 가슴을 압박하다 두 눈을 질끈 감은채 인공호흡을 시도했다.

"훕~ 훕~"

이런 행동을 얼마나 했을까. 입술을 때고 다시 가슴을 압박하자 혈색이 돌아오는 것처럼 보이더니, 이내 곧 기도에 막혀있던 무언가를 뱉어내기 시작한다.

"쿨럭~ 쿨럭~ 하아... 하아..."

숨이 돌아온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도 그 자리에 그대로 쓰러졌다.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을에서 사람들이 달려오며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여~ 어디! 웅덩이에 들어가지 말라고 팻말까지 설치해 놨는데, 대체 거긴 뭐하로 들어간겨~"

팻말? 팻말이라면 아까 내가 봤던 숫자 1의 팻말을 말하는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숲 속에 버려진 팻말을 찾아 뒷면 글씨를 봤다.

'수심 깊어유~ 수영 금지여유~'

"헐... 후..."




그렇게 한바탕 소동이 지나갔고 우리 집 앞마당에 모두 모이게 되었다.

정신이 돌아와서 굳이 병원은 가지 않겠다는 에릭의 고집에 담요만 몸에 두른 채 산에서 내려와 마당 한쪽에 앉는 그였다. 마을 어른들은 에릭과 그의 친구에게 물에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을 보지 못했느냐며 추궁한다.

"팻말? 없던데요."

"잉? 없었다고? 날짐승이 물고 갔나, 그게 어디로 갔댜?"

"김 씨가 분명 어제 거기다 설치하고 왔다는디, 어떻게 된겨~"

마을 어른들이 부르는 김 씨는 우리 아빠다. 우리 아빠도 곤란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자기는 억울하다고 항변을 해본다. 당연히 그럴 것이 그 팻말은 내가 치웠으니까...

부엌에서 미숫가루를 여러 잔 준비하고 마당으로 나선다. 그리고 그 순간 에릭과 나는 정식으로 눈이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 에릭의 눈빛이 왠지 모르게 뜨겁게 느껴진다. 옅은 미소를 보이며 내게 눈인사하는 에릭의 모습은 마치...

"얘!"

내가 준비한 미숫가루를 한 목음 하신 마을 어른이 나를 향해 고함을 치신다.

"미숫가루에 뭘 넣은 겨?! 설탕을 넣어야지, 소금을 넣은 겨?!"

"소... 소금요?"

당황스러운 말에 나도 들고 있던 쟁반 위의 미숫가루를 마셔본다.

"아이고, 짜~"

창피한 실수를 에릭이 보고 껄껄 웃음을 짓기 시작했는데, 그 상황이 무척 부끄러웠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상황에서 에릭의 친구가 자기 옆자리에 앉으라 한다.

"창연이라고 해요. 조금 전 물속에서 구해준 이 친구는 에릭이라고... 친구가 외국생활을 오래 해서 그렇게 불러요."

"아, 그래서 이름이 영어씩이었구나."

"소금으로 탄 미숫가루... 매력 있네요."

"하하하..."

멋쩍은 웃음으로 부끄러움을 날려보려 했다. 에릭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감격스럽게 입을 연다.

"정식으로 인사할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그가 내민 손,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 가슴이 마구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한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에릭의 손을 잡아본다. 조금 전 차가웠던 그의 숨결을 알기에 혈기가 돌아온 에릭의 손은 너무나도 크고 따뜻했다.

그날 저녁은 우리 집 마당에서 삼겹살 파티가 준비되었고 마을 어른들, 에릭, 창연이라는 남자는 노래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몇 시간이 흐른 뒤 사람들은 모두 돌아갔고 남은 정리가 어느 정도 끝났을 때 마당을 지나 내 방으로 향하는데 에릭이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왜... 안 들어가세요?"

"별이 예뻐서요. 도시에서는 볼 수 없는 별자리가 여기서는 모두 보여서 너무 신기해요."

"아, 시골이라 그렇겠죠."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데..."

에릭은 굉장히 순수한 표정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던 그때의 모습과 지금 밤하늘에 별을 보며 신기해하는 모습... 요동치던 내 심장에 브레이크가 고장 난 것처럼 그의 모습에 점점 끌려가게 된다.

"그러고 보니 절 구해주신 분 이름도 모르네요. 이름을 물어봐도 될까요?"

나에게 이름을 물어보는 에릭의 목소리에는 작은 떨림이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느낄 수 있었고 내 이름을 말하는 내 목소리도 떨려온다.

"인... 인어."

"인어?"

"네, 인어라고 해요. 인어공주..."

"인어... 예쁜 이름이시네요. 한 번에 기억도 되고."

"예뻐요? 헛!"

부끄러웠다. 나도 모르게 내 방으로 쏜살같이 달려 이불속으로 들어가 혼자 키득키득 웃기만 했을 뿐이다. 그냥 마치 기분 좋은 고백을 받은 느낌이랄까...?

아차, 잘 자라는 인사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내 방문을 살짝 열고 에릭을 바라본다. 에릭은 내 방 쪽을 지그시 쳐다보며 나만 알아볼 수 있는 입모양으로 말을 해준다.

"잘 자요. 인어공주씨."

설레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지만 그렇게 달밤은 지고 다음날을 기다리게 되었다.




"꼬끼오~"

수탉은 목청도 우렁차게 아침을 알린다. 설레던 마음을 진정시키고 간신히 잠이 들었지만 쉽게 잠이 들었겠는가. 피곤에 쩌든 모습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늘어지게 켜봤다.

"흐아아암~"

졸음을 깨기 위해 대청마루에 앉아 집 밖을 아무 생각 없이 쳐다만 본다. 아빠는 밭에 일하로 나가신 모양이고 건너방에서 잠을 잔 에릭과 그의 친구는 잠을 잘 잤을까 궁금해 조심조심 그들의 방문 앞에 다가서 본다.

방 안에서 둘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이 지역을 모두 개발하려면 우선 이 마을 주민들부터 이주를 시켜야 해."

창연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들이 나누는 대화 소리는 뭔가 좀 이상했다.

"개... 발?"

곧이어 에릭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나 이 마을, 그냥 놔두고 싶어 지더라."

에릭의 말에 창연이 대답한다.

"무슨 소리야 갑자기?"

"어제 밤하늘에 별을 보는데, 이렇게 깨끗한 마을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 아쉬웠어."

"사전 답사 와서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그리고, 이 집 아저씨 딸 있잖아."

"어제 너 구해준 생명의 은인?"

"인어공주."

"뭔... 뭔 공주?"

"귀엽더라."

"헐... 아주 코미디를 해라. 여자 한 명 때문에 500억 원짜리 프로젝트를 망치겠다고?"

"그냥... 그렇다고. 계속 일 얘기나 해봐."

그랬다. 에릭과 창연은 우리 마을을 포함해 인근을 개발하기 위해 사전 답사를 온 사람들이었다. 우리 마을과 터전이 사라지게 된 다는 것은 정말 불행이지만 나는 그보다 에릭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보고... 귀엽다니...'

마냥 좋은 기분에 뒷걸음질을 치던 내 발에 바닥에 놓인 세숫대야가 걸려 소리가 났다.

"따당~"

"이크, 이를 어째..."

방에 있는 두 남자가 밖으로 나오기 전에 그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서둘러 부엌으로 향했고 에릭의 말에 나는 어쩔 줄 몰랐다.

아침을 준비하는데 그들의 방에서 에릭이 부랴부랴 겉옷을 입으며 뛰쳐나온다. 무슨 일인지 몰라 그냥 지켜만 보고 있는데, 에릭은 창연에게 남은 일을 부탁한다며 먼저 서울로 떠난 다고 한다. 천청벽력 같은 소리에 부엌에서 뛰쳐나와 에릭 앞에 선다.

"가... 가시는 건가요?"

"아, 서울에 급한 일이 생겨서 제가 먼저 가야겠어요. 제 친구는 오늘 점심까지 이곳에 있을 겁니다."

"급... 급한 일..."

이렇게 에릭을 보내면 또 언제 볼까 하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했지만 그를 붙잡을 방법은 없었다.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지 않나.

급히 떠나는 에릭의 뒷모습만 바라보며 아쉬워하고 있을 때쯤, 그의 외투에서 뭔가 하나 떨어지는 것을 봤다. 아빠의 차에 탄 에릭에게 바닥에 떨어진 뭔가를 주워 주기 위해 나는 달렸고, 바닥에 떨어진 것을 줍자마자 아빠의 차는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달리기 시작했다.

결국 에릭이 흘린 물건을 전해주지 못했지만 내 손에 쥐어진 것이 도장이라는 건 확실했다. 무슨 도장인지는 모르겠지만, 엄청 중요한 도장처럼 보인다.

떠나는 에릭에게 멋진 작별인사도 건네지 못해 서운함이 가득했지만 떠나는 사람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느냐...

남은 창연은 점심을 먹고 콜택시를 불러 가겠다고 한다. 도착한 택시를 타며 나를 부르는 창연.

"인어 씨, 제 명함인데 언제 서울 오실 계획 있으면 연락 한번 주세요. 에릭이랑 같이 한잔해요."

그렇게 창연도 우리 마을을 떠나게 되었고 그들이 있던 단 하루가 나에게 큰 공허함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서울 어떤 큰 건물 사무실 안.

일을 하고 있는 에릭과 창연은 큰 난관에 부딪힌 모양이다. 에릭은 자신의 옷을 뒤적이며 곤란한 표정으로 뭔가를 찾는 모습이었고 창연은 그런 에릭에게 따지듯 묻는다.

"대체 계약 도장을 어디에 둔 거야?"

"모르겠어. 모르겠다고."

"그 도장 3일 내로 못 찾으면 이번 사업 다 끝인 거 알지?"

"알아, 안다고! 좀 가만히 있어봐."

에릭은 분명 자신의 겉옷에 넣어둔 500억 원 프로젝트의 계약 도장이 사라진 것에 당혹스러워했다. 도대체 그 도장이 어디로 간 건지 도저히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빌어먹을... 대체 어디에 둔 걸까..."

그때 창연에게 메시지가 도착했다.

"깨톡~"

"야, 에릭! 빨리 찾아봐. 중대한 문제라고 이건!"

창연은 도착한 문자를 확인하자마자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자신의 옷을 계속 뒤적이는 에릭을 바라보며 입을 여는데...

"야, 유레카! 찾았다."

"뭘 찾아?!"

"도장!"

"도장?"

"그때 너 구해준 생명의 은인."

"생명의... 은인?"

"공주! 인어공주가 가지고 있다고 나한테 문자 왔는데?"

"뭐라고?! 문자에 뭐라고 쓰여 있는데?"


'지난번 주신 명함보고 연락드립니다. 에릭 씨 떠나실 때 외투에서 무언가 떨어진 걸 봐서 제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 하나 있는데, 도장이에요. 급하실까 봐...'


에릭은 창연의 휴대전화 메시지를 바라보며 황당하다는 미소와 함께 도장을 찾으러 가야 했다. 급하게 전화를 걸기 시작하는 에릭이다.

"여보세요? 인어 씨, 저 에릭이에요. 잘 계셨죠?"




"띠리리리~ 띠리리리~"

창연에게 메시지를 보낸 후 얼마 되지 않아, 창연에게 전화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나는 창연의 전화를 받았는데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창연이 아닌, 에릭이었다.

"인어 씨, 잘 계셨죠?"

"에... 에릭 씨."

"아, 내가 인어 씨 얼마나 생각했는 줄 알아요. 와~ 그런데 어떻게 도장이 딱 거기 있죠?"

"네? 제 생각을 하셨다고... 요? 어머, 거짓말도."

"하하하! 정말입니다. 다시 얼굴 보로 제가 가야겠네요."

나를 만나기 위해 에릭이 다시 찾아온다는 말에 정중히 거절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제가 서울로 갈게요. 가서 다 같이 얼굴 한 번 보면 좋죠."

"오시려면 먼 거리인데... 직접 오시겠다고요?"

"사실 서울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요. 서울 구경도 할 겸, 에릭 씨도 볼 겸..."

말하는 내 모습이 너무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렇게라도 다시 에릭을 만날 수 있다면 아무리 멀고 힘들어도 달려가고 싶었다.

"그럼 언제 오실 건데요? 사실 제가 그 도장이 급해서..."

에릭이 급하다는데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나. 오늘 당장 서울로 가겠다고 약속하고 만날 장소를 정한 뒤 통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후 나도 모르게 큰 소리로 환호성을 질러본다.

"야호~!"

이제 문제는 아빠에게 허락을 받는 일이다. 우리 아빠는 굉장히 보수적이시기 때문에 내가 혼자 서울에 간다고 하면 펄쩍펄쩍 뛰시며 반대할 게 뻔했다. 하지만 아빠를 어떻게 해서든 설득해야 했다.

밭에서 오전 일과를 마무리하신 아빠가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괜히 머리도 다듬어보고 최대한 정숙한 자세로 아빠 앞에 서본다.

"우리 공주님, 왜 이렇게 예쁜 척이야?"

"아니, 그냥..."

"뭐, 아빠한테 할 얘기라도 있니?"

"그게... 사실..."

아빠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곤 고개를 숙인 채 두 눈을 질끈 감아본다. 분명 반대하시겠지만 혹시 모를 허락을 받았을 경우 기쁨을 숨기기 위한 나만의 방어자세였다. 곧 아빠의 근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 돼."

"아... 아빠..."

"서울이 어디라고 혼자 간다는 거야? 그리고 오늘 가면 내일이나 돼야 출발한 건데, 잠은 어디서 자고?!"

"에릭 씨가... 아니, 지난번 왔던 손님들이 호텔방 잡아준다고 약속했어요."

"시끄럿! 남자들 말을 어떻게 믿어?!"

아빠의 반대는 단호했고 강렬했다. 하긴, 어떤 아빠가 하나밖에 없는 딸을 손님으로 잠깐 찾아왔던 남정네들을 만나로 가겠다고 떼를 쓰는데 쉽게 보내주시겠는가.

하지만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법. 아빠의 단호한 반대 역시 나에게 씨도 먹히지 않는 일이었다. 아빠에게 난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라며, 뭐든 이겨낼 수 있고 경험해볼 수 있는 나이라는 것을 어필하기 시작했지만 아빠의 선택은 변함없었다.

"안 돼! 절대."

결국 아빠의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에릭과 한 약속을 어길 수 없었기 때문에 오후에 밭일을 나가시는 아빠의 뒷모습을 확인하며 탈출(?)을 감행한다. 아빠방에 미안함이 가득 담긴 쪽지 하나를 남긴 채 서울로 떠난다.

에릭과 만나기로 약속 한 장소는 서울 어떤 큰 건물 사무실이었지만 서울에 처음 도착한 나는 멀미가 날 정도로 어지러웠다. 정신없이 지나치는 많은 사람들과 어디가 끝인지 모를 높은 건물들 사이에서 에릭이 알려준 큰 건물을 찾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후 5시경 도착한 서울에서, 에릭이 알려준 만남의 장소를 찾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만나 물어봐야 했고, 지하철을 처음 타본 촌년에게 환승은 절망적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도착해보니 어느덧 시간은 밤 9시가 다 되었다. 휴대전화도 없었던 내가 명함 하나 들고 찾은 큰 건물 정문 앞에 서서 공중전화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자 이를 이상하게 느낀 경비원이 나에게 다가온다.

"아가씨, 어떻게 오셨어요?"

"아, 다른 게 아니라 여기 명함에 있는 분을 찾아왔는데요."

"명함? 이리 줘보세요."

나에게 창연의 명함을 받은 경비원이 큰 건물 몇 층으로 가면 만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었고 나는 허리를 숙여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해 걷는 한걸음 한걸음마다 두근거림이 느껴진다.

"땡~"

드디어 에릭과 창연이 기다리고 있을 층수에 도착했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불 꺼진 사무실들 사이로 긴 복도가 있었고 복도 끝에 켜진 불빛을 향해 조심스러운 걸음걸이를 시작해본다. 며칠 전 관광객으로 놀러 와 내 마음을 훔쳐간 에릭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설렘은 오늘 하루 몇 시간을 도시에서 버려진 시간을 모두 보상해줄 것이라 믿었다. 그렇게 복도 끝에 도착했을 무렵, 사무실 유리벽 사이로 내부가 보였고 등을 지고 앉아 있는 건장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분명 에릭이었다.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며 손을 흔들어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에릭의 등 뒤로 긴 머리의 여자가 보였다.

마치 연인처럼, 아니 이미 모든 관계를 나눴던 상대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하는 에릭이다.

에릭은 단추가 풀려있는 자신의 와이셔츠를 고쳐 입으며 그녀에게 말한다.

"창연이 곧 올 거야. 그래서 그만 해야 돼."

"별일이야. 나는 좋았는데. 창연 오빠가 그렇게 무서워?"

"무섭다니, 매너고 에티켓이지. 너랑 나랑 재미보고 있는 거 알면 창연이가 실망할 거 아니야."

나는 그 장면을 보고 너무 놀라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오빠, 오늘 손님 온다고 하지 않았어?"

여자가 에릭에게 나에 대해 묻는 분위기다. 에릭은 내가 오늘 이곳으로 온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아, 그 촌년. 온다고 하더니 안 오네. 길을 잃어버렸나."

"촌년? 누군데?"

"며칠 전, 개발 건으로 답사를 갔던 동네에 사는 여잔데. 물에 빠진 나를 구해줬었거든."

"어머, 대박이네. 그래서?"

"뭐 어쩌다 보니 회사 계약 도장이 그곳에 떨어졌는데, 알지? 이번 계약 3일 내에 도장 안 찍으면 물거품이라는 거."

나를 표현하는 단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촌년이라니... 나는 너를 구해준 생명의 은인인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건지...

"도장만 받고 적당히 놀아주는 척하다가 돌려보내고 몇 개월 후, 눈물 흘리면서 집에서 쫓겨나겠지. 개발공사 들어가니까."

"그럼 그 촌년은 자기네 마을이 사라지게 되는 도장을 직접 배달하는 거네?"

"훗... 이름도 촌스러워. 인어가 뭐냐, 인어가. 시골 촌뜨기 주제에."

"인어? 푸하하하! 진짜?!"

모욕감을 느끼며 뜨거운 눈물이 내 빰에 흐르기 시작했다. 잠시나마 에릭을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느낀 나의 철없는 행동이 역겨울 만큼 싫어졌고 빨리 그곳을 떠나 아빠가 계신 집으로 향해야 했다.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내 앞에 서 있는 건 창연이었다. 흠칫 놀란 나의 표정을 본 창연이 책상 스탠드 등만 켜진 사무실 안을 보며 내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창연은 무덤덤하게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인어 씨, 다시 보니 반가워요."

"......"

내가 모든 걸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된 이상 그곳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오로지 앞만 보고 달리기 시작했다. 엘리베이터는 다른 층에 있었기 때문에 탈 수 없었고, 계단을 향해 뛰었다.

내가 뛰는 모습에 에릭과 창연은 놀라며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소리치며 따라온다.

"멈춰! 거기서!"

"잡... 잡아! 창연아, 무조건 잡아! 도장! 도장!"

몇 층을 그렇게 달렸을까, 건장한 남자들의 쫓아오는 상황이 너무나도 무서웠고 이곳에 내가 있는 자체가 싫었다. 가파른 계단을 뛰다 보니 다리가 걸려 그만 구르고 말았다.

"쿵! 데굴데굴..."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등이 아파왔고 척추를 다쳤는지 다리가 움직이질 않는다. 계단 끝에 쓰러진 채 희미해지는 시력은 안개가 낀 거처럼 뿌옇게 흐려진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어느 한 종합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아무도 없는 병실, 내가 이곳에 왜 누워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물병을 들고 들어오는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깨어났니? 몸은 어때?"

"아... 아빠..."

"응, 그려. 이제 됐구먼. 당장 의사 선생님 모셔올게. 잠깐 있어."

내가 깨어난 걸 알리는 아빠의 모습, 너무 죄송스러웠다.

"여기, 사람이 깨어났슈! 의사 선생님, 간호사 선생님!"

나의 예상처럼 그곳을 빠져나오기 위해 계단을 뛰어내려오던 중 계단에서 넘어져 척추를 심하게 다쳤다고 한다. 그래서 다시는 걸을 수 없는 중상이라고 한다.

안정을 취하라는 말과 함께 의료진이 모두 병실 밖으로 나가자 아빠는 살아서 다행이라며 그나마 안도의 한숨을 내쉬신다.

"우리 공주, 심심하지? 텔레비전 볼까?"

"......"

"삑~"

나의 울적함을 달래주려고 아빠는 텔레비전을 틀어주신다. 뉴스가 나오며 속보를 전해준다.

"불법 개발을 위해 정치계에 로비를 하던 일당이 체포되었습니다. 에릭이라는 예명을 쓰던 주범과 공범자 창연은 경찰서에 수감되었고 그들이 계획한 개발사업은 전면 취소되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그렇게 보고 싶었던 그 자식 에릭과 친구 창연은 고개를 숙인 채 모니터 앞에 서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나의 다리를 한 번 쳐다본다.

소리 없이 병실 창문 밖을 보니 높고 높은 빌딩 숲은 정말 멀리가 날 정도로 높아 보였다.

나에게 에릭이라는 존재는 '어쩌면 사랑'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의 에릭은 '절대 아닌 사랑'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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