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목숨을 버린 자는 죽어서도 고통을 받는다는 말이 있다. 설마 만물의 이치와 만사의 지혜를 알고 계신 신이 그렇게 편협할까. 자신의 고통을 스스로 감당한 인간에게 조악한 잣대를 들이대며, 앞뒤 맥락을 잘라낼 분은 결코 아닐 것이다.
황유나-내일, 내가 다시 좋아지고 싶어
인간은 은연중에 벌을 내리는 신이 실재하기를 바란다. 뼛속까지 스민 권선징악이 먹히질 않을 때면 으레 죽음 뒤에 심판을 받을 것이라느니. 내생에 벌을 받을 것이다는 등의 가설을 짓고 위안을 받으려 한다. 분통 터지게도 착한 사람은 불행하게 살다가 생을 마감하고 나쁜 사람이 떵떵거리며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매번은 아니더라도 분명 그런 일이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어느 날 사자가 갓 태어난 사슴을 잡아먹었다. 그 후로 어미 사슴은 편히 잠에 들지 못한다. 왜 하필 내 새끼를. 그놈의 넘실이는 갈퀴만 떠올리면 머리가 달아오르고 심장은 요동친다. 지나가는 사자의 꼬리만 보아도 몸서리치게 증오감이 올라온다. 풀 하나를 삼킬 적에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자의 울음소리에 차마 목구멍을 넘기지 못하고 대신 끓어오르는 분노를 쥐어 삼킨다. 어미 사슴은 이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만다. 정작 새끼 사슴을 죽인 사자는 평화로이 갈대숲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다.
인간 중심의 관점을 내리고 바라본다면 자연은 더할 것 없이 잔인하고 극악무도한 사건이 쉼 없이 일어나고 있다. 하다못해 인간은 하등 생물보다 지성을 가졌다는 이유로 무렇지 않게 끝없는 살육을 저지르고 자연을 파괴한다. 동물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줄 알던 시절에는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젠 뭘 좀 아는 인간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여전히 그들에게 공포와 분노의 감정을 심어주며 잔인하게 살육하고 그에 대해 일절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 중심으로 본들 역시나 최악의 피해는 나의 이익을 위해 한 생명을 끝장내는 것이다. 그저 갈 길을 걸어갈 의도, 생명으로서 지닌 존재의 목적을 깡그리 묵살하고 마음껏 유린할 권리를 누가 감히 허락할 수 있을까. 인간은 죽고 죽이는 일을 벗어난 예의 사연에 대해조차 스스로가 피해자라는 발상을 도무지 벗어날 줄 모른다. 나는 아빠에게 버림을 받았다. 하염없이 휘둘렸고 가슴이 짓눌리는 괴로움이었다. 어느 날엔가 문득, 아버지라면 으레 원하는 생을 포기하고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생각을 누가 나의 머리에 심어줬는가를 고민했다. 그러므로 나는 피해자였으나 내게 가장 큰 해악은 바로 그 생각으로 인한 고통이었다.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무릇 자신의 원을 참고 끝까지 인내해야 정상이라는 '생각'. 부모라면 반드시 자식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 '생각' 말이다.
아버지부터 시작해 선을 잇자면 살며 겪은 피해는 줄줄이 햄처럼 이어진다. 흔하게도 돈을 떼먹이는 일 역시 일어났고, 원치 않는 누군가가 몸을 더듬는 날도 있었다. 바로 보는 뒤에서 험담을 하거나 죽도록 애먹이며 나를 이용하는 일도 서슴지 않고 벌어졌다. 더러는 무릎이 꺾인 날도 있지만 대체로 나는 곧장 생각을 의심했다. 옳고 그름에 대한 기준에 의문을 가졌다. 그래 나는 한 점의 티끌 없이 어떤 존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가. 나를 괴롭히는 생각을 내리고 보면 모든 일이 아픈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다. 모두가 피해자이면서 가해자인 세상, 반드시 누군가는 다치고 아플 수밖에 없다.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당신이기도 할 것이다. 생명이 끝장난 게 아니라면 일어난 일은 별 수 없대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하다. 오만을 내려놓고 피해를 받고야 말았다는 그 억울한 피해의식을 벗을 때, 비로소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상처 난 몸을 가리고 누르느라 도리어 상처를 키우는 자신을 알아차려야 한다. '생각'은 내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자유로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