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꽃

마흔에 가까워오니

by 하민혜

도종환 님의 시집이 눈에 띄어 읽어 내려갔다.


그만이 가진 사색과 철학이 녹아든 시구에 흠뻑 젖어들었다.

여기 사랑받고 있는 그의 시 한 편을 공유한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도정환, 흔들리며 피는 꽃-

여자 나이로 마흔에 다가오니, 이제 정말 꽃이 지는 느낌이다. 물론 결혼도 늦는 요즘인 데다, 수명이 늘어나 설지 확실히 덜 늙어가긴 한다만. 아무리 그래도 20대의 산뜻함, 10대의 풋풋함은 결코 가질 수 없음이다. 오크통에 향기가 진해지듯, 결이 다른 성숙함이 느껴지면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30대가 되자마자 내게는 젖먹이 아기가 둘이 생겼다. 꽃이 활짝 피어났던 그때에 오직 아기들에게 집중했다. 사랑스럽고 신비한 아기 새싹들은, 그 무엇과도 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나의 시선과 마음을 온통 빼앗았던 아기들은 이제 초등학생이 되었다. 30대의 나는 일절 기억에 없는데, 훌쩍 널뛰듯 마흔이 다가온다.


나는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흔들릴 때에 분노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했다. 연인과 헤어졌을 때, 주머니가 텅 비었을 때, 하려던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 미움을 받을 때, 인정받지 못할 때, 도움받지 못할 때, 누군가가 내 마음을 몰라줄 때. 에라이. 인생은 좀체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라고 포기하는 때가 많았다. 투쟁보단 백기를 드는 셈이었다. 불평은 적었는지 몰라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다른 문을 연 것도 아니었다. '화는 나지만 어쩔 수 없지!' '슬프지만 별 수 있나?' 조금은 비아냥대며 돌아섰을 뿐이다.


부족하고 가치 없는 나를 바라보기가, 인정하기가 참 싫었다. 분노나 슬픔, 괴로움, 우울 따위의 감정이 없는 척하는 게 차라리 쉬웠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돌아서 버릇하니,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도 같았다. 나를 속이는 일을 지속했다. 상처를 보지 않고 없는 척하면서 고통을 무시하는 일이 습이 된 것이다. 이렇게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게 삶을 살아가는 '현명한' 어른이라 생각을 했는지도 모른다.


감정이 춤을 추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그 어떤 감정도 쉬이 올라오지 않았다. 해서 최악의 곤란한 상황도 없지만, 최고의 기쁜 상황도 없음이 흠이었다. 중요한 것은, 없는 척했던 감정들을 '느끼는' 것이 '삶' 그 자체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것이다. 또 보지 않는다고 해서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아프기 싫어서 얼른 덮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갔지만, 상처는 곪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은 그네와 같아서 내가 원하는 일과 그렇지 않은 일을 모두 겪을 수밖에 없다. 이 쪽이 좋다고 세게 힘을 주면 결국 원치 않는 반대 방향으로 세게 내딛는 꼴이다. 그네의 반동을 생각하면 쉽다. 오히려 힘을 뺄수록 (원치 않는)반대로 나아가는 힘이 줄어든다. 그렇다고 그네를 멈추고 흔들지 않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러므로 높이 올라갔을 때의 기쁨에 오만하지 않고, 내려갔을 때의 슬픔을 미워할 일이 아닌 뜻이다. 생에 임한다면 누구나 반드시 훑고 지나갈 모든 감정에 대하여 또 고통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조금은 알 것만 같다. 감정이 없는 척하며 죽음과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것은 방법이 아니었다. 그저 흔들리는 삶을 있는 그대로 즐기는(수용하는 그리고 애정하는) 마음이다. 분노하고, 우울하고, 미움받는 슬픔을, 버림받는 외로움을 더는 미워하지 않는다.

화가 나지만, 외롭지만 때로 슬프지만 그 느낌이 싫지 않다. 분명 화를 내고 있는데도 살아있음의 환희를 느낀다고 하면 거짓말처럼 들릴까?

흔들리는 꽃. 흔들리는 사랑. 비가 내리기에, 이따금 날아갈 듯 바람이 불기에 삶은 참 아름답다. 과연 생을 통틀어 따사로운 햇볕만이 빛난다면 그 햇볕을 느낄 수 있을까. 내가 왜 생을 택했는지, 조금은 알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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