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력(respons ability)을 가지기 위해선, 책임감(responsibility)이 필요하다.
살아오며 내가 가져보았던 책임에 대해 떠올려본다. 동시다발로 어떤 역할이나 일에서 책임감을 가졌던 적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그중 가장 크고 명백하게 느낀 책임은 아기들을 가진 후부터였다. 엄마로서의 역할, 그 책임감은 아이에게 생기는 모든 일들에 대한 반응력을 최대치로 끌어올렸다. 나는 어릴 때부터 잠귀가 어두운 편이었다. 일단 잠에 들고 나면 옆에서 소란을 피우며 북을 쳐도 잘 깨지 않았다. 첫애를 낳고나니 아기가 두 시간에 한 번 젖을 달라고 울어댔다. 잠을 자는지 마는지 모르게 밤이 지나가기 일쑤였다. 연년생으로 낳은 둘째도 오래간 모유수유를 했는데, 두 아이가 새벽에 번갈아가며 울어댔다. 기저귀를 갈거나, 젖을 물리는 둥 밤 중에 깊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피곤해서 곯아떨어질 법도 한데, 아기가 조금만 뒤척여도 그 기척에 잠에서 깼다. 아주 살짝만 숨소리가 달라도 눈이 반짝하고 떠졌다. 지금도 아이들과 함께 자는데, 모기 물린 데를 긁거나 기타 이유로 잠을 설치면 나도 함께 깨어난다. 잠들면 시체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었는데 엄마가 된 후로 이토록 반응력이 높은 사람이 되었다.
반응력이 높아진 이유는 아무래도 엄마로서의 책임을 크게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그 책임은 나로 하여금 그 어떤 희생 앞에서도 머뭇거리지 않게 한다. 그로 인한 고통이나 고생을 선택함에도 주저함이 없다. 하루 일과의 모든 우선순위가 엄마라는 역할을 향해 있다. 심지어 나 스스로를 버리거나 아프게 하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다른 일에도 책임을 맡은 적이 있고, 최선을 다하기도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왜일까? 놀랍게도 책임은 애정을 그러니까 사랑을 밑바탕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내가 회사 간부로서 일말의 애정 없이 다만 돈을 벌기 위해 책임을 갖는다고 해보자. 과연 몸과 마음 다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이쪽에 붙었다가 어떠한 이유에서 반대쪽에 붙었다가 하는 사람을 떠올려보자. 쉽게 말해 책임감이 없어 보이는 사람을 말이다. '간신'이라 부를성싶은 사람들. 그 행동이 나의 이득과 무관한 일일지라도 가슴 한편이 불쾌해지는 것은 별 수 없다. 간신, 배신자, 또는 그저 책임을 내버리는 자이더라도 그 행동에는 분명하게도 사랑이 존재하지 않는다. 굳이 그런 말은 않더라도 그 행동만으로 사랑의 부재를 알 수 있기에 우리는 불쾌해진다.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다. 나는 책임감을 갖기 위해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책임감은 저절로 따라온다. 이제 답은 쉽다. 어떤 일에든, 역할에서든 내가 최선을 다하지 못하는 이유는 애정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맡은 모든 일에 책임을 다하는 게 가능할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모든 일에 사랑을 더하는 것이 가능할까? 이론적으로는 가능하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도파민 분비로 인해 두근거리는 호르몬 작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한 정의는 책 한권을 써도 모자란다. 이 문제는 차치하고 내가 만일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책임을 벗어던지는 것은 어떤가?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묻는 것이 아니다. 왜 책임을 다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며칠 전 두 아이가 심하게 다퉜다. 처음은 말싸움이었는데 결국 큰애가 작은애를 때려서 울리고 말았다. 나는 다가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윤우가 나보고 자꾸 야!라고 하잖아."
" 어떤 이유에서건 때리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엄마가 이야기했었는데."
"그럼, 윤우가 나한테 야!라고 하는 건, 그건 해도 되는 거야?"
딸이 울며 따져 물었다.
"서연아, 동생을 때렸을 때, 그리고 지금 엄마한테 이야기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지 이야기해볼래? 지금 너의 생각을 묻는 게 아니야."
어떤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때, 그리고 해야 할 때, 그것을 머리로 생각해서 움직인다고 착각할 때가 많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그리고 나를 돌아보며 느낌에 집중하게 되었다. 동생을 때리면 안 되는 이유가 단지 남에게 피해를 주면 안 되기 때문은 아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실수로든 고의든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이를 절대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로 옳고 그름을 가늠하며 행동할 게 아니라 어떤 느낌이 드는지를 기민하게 알아차려야 한다. 누군가를 아프게 할 때, 이득만을 좇을 때, 타인을 미워할 때 우리는 분명 편안하지 않다.
책임 역시 마찬가지이다. '책임감을 가져야지.' '책임감을 가지면 반응력이 높아지는구나!' 머리로 아무리 생각하고 다짐한다 해서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는 느낌에 있다. 아이들에게 책임을 다하지 않았을 때 뱃속 깊숙한 데서 느껴지는 불편함 말이다. 또 책임을 다하느라 일말의 희생이 있을지라도 가슴 한켠이 따스해지고 편안해지는 느낌을 이야기한다. 이런 행동은 아이들이 어떻기 때문이거나, 다른 누구에게 잘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다른 일에서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일을 함께 하는 이들이 훌륭해서거나,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거나, 물질을 위해서라면 책임을 다하기 어렵다. 이유가 없이 무조건일 때, 그러니까 일에 애정을 가질 때야말로 그 책임의 힘은 막강해진다. 무엇에도 거스를 수 없는 강력한 힘은 오직 사랑에서부터 나온다. 미움(원망)은 목소리는 크지만 힘이 없다. 머릿속에서는 '저 사람 때문이야!' '회사가 왜 이모양이야!' '상사만 바뀌었으면.' 원망의 큰 목소리가 들릴때가 있겠지만, 그 목소리(생각)를 따라갈 때 우리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머리가 아닌 가슴을, 작고 조용해서 들릴 듯 말듯한 느낌에 귀 기울이고 행동할 때 비로소 강력한 힘을 경험할 수 있다. 무엇보다 그렇게 느낌을 따를 때 나는 진심으로 행복감을 느낀다.
responsibility(책임감)를 가지면 respons ability(반응력)가 생긴다는 이야기는 지난 nja 박병기 교수님에게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살아가며 책임을 져야 할 일들이 많다. 자유를 외치는 이들도 결코 아무 책임이 없는 삶을 바라는 것이 아니다. 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반드시 누군가에게 영향력을 끼치고, 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게 마련이다. 이따금 말에 힘이 있고, 행동에 아우라가 느껴지는 사람을 보면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을 느낀다. 고로, 행동하는 마음에 사랑이 있는 사람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을 늘 원하고 있고,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내가 그런 사람이길 바라고 있다. 머리로 하는 생각은 힘이 약하다. 가느다랗고 희미하지만 뱃속 깊숙한 느낌에 귀를 기울여보기를 권한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때로 책임감을 상실할 때에는 애정이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그로 인해 불편한 느낌에 귀를 기울인다.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했을 때에 내 영혼이 편안한지 귀를 기울여보면 결국 무조건적인 사랑 그리고 헌신이다.
내가 아이들에게 그렇듯이, 진정한 사랑을 바탕으로 책임을 가질 때 더없는 행복감과 만족감이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각자 맡은 일에서 또 친구, 가족으로서 이렇듯 애정을 갖고 책임을 다하며 살 수 있다면 어떨까? 더없는 행복감을 느끼는 사람이 하나, 둘 많아진다면 이 세상은 더욱 좋은 세상이 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