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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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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혜 Apr 23. 2024

구멍

아침편지

좋은 아침입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있어요. 끝에 다다라 아쉬움에 미적대고 있습니다. 좋은 소설은 단박에 끝날 적이 많아요. 꿈처럼 빠져들다 깨어날 적엔 미련이 남지요.


엊저녁 하늘의 잔광이 사위어가고 작은 아이가 허덕지덕 잎을 모으고 있었어요. 더 늦기 전에 저녁을 먹자는 제 마음이 아이에게 전달돼서요.


 "엄마! 이제 마지막 잎이야. 이것 좀 만져봐!"

건넨 잎은 아기 솜털처럼 폭신하고 보드라웠어요.

노을빛에 잎의 숨구멍이 반짝입니다.




노트북을 얹은 거치대 뒷면엔 다리가 두 개 달려 있습니다. 가느다란 두 다리가 묵직한 노트북을 끄떡없이 들어 올려 주는데요. 바닥면에 누워있는 두 다리에 구멍이 뚫려 있어요. 좀 더 일어나고 싶거든 가까운 구멍에, 뻗고 싶거든 멀은 구멍에 다리를 걸 수 있습니다. 구멍이 없었다면 버틸 수 없었을 거예요. 구멍은 버팀목같은 역할을 합니다.



사람은 9개의 구멍, 구규가 있다고 해요. 아시다시피 눈, 귀, 코, 입을 포함해서요. 구규 덕분에 세상을 받아들이고 소통하는 우리예요. 노폐물을 쏟아내기도 하는 것이 마치 집에 창문과 같아요.


종일 창을 열어두기를 좋아해요.

한겨울이면 난방 때문이 아니라도 칼바람에 여닫기 쉬운데요. 저라면 겨울에도 하루 한 두 번은 한창 열어둡니다. 어려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면 차창을 열었어요.


흘러오고 흘러가는 느낌이 좋아요.



아무렴 드나드는 것이 좋기만 할까요.

호흡을 위해라면 불가피하지만 구멍 덕에 온갖 풍파를 맞이하지요. 마치 산소가 우리를 살게 하고 죽이는 것과 같아요. 죽음과 생이 하나듯, 좋고 나쁨은 생각이지 애초에 구별할 수 없는지 모르겠어요. 언제나 한쪽만을 취하려 애쓰는 우리지만 불가능하단 이야깁니다.



목표하는 그곳이라도, 가지려는 그것이라도 구멍이 있을 테죠. 행복이라 믿는 지점에도 꼭 그만큼의 불행이 함께일 거고요. 더 나은 내일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정말로 안다면요. 지금 여기서, 가진 게 적거나 없더라도 기쁠 수 있습니다.  


공기가 맑아요. 창 열기 좋은 날입니다.


이미 열린 구멍이에요. 닫으려면 이 생을 떠나야 하고요. 기왕 열린 거 마음 활짝 열고 살아요 우리.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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