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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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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혜 Jul 07. 2024

풍성하고 담백한 하루

아침편지

좋은 아침입니다. 모처럼 훤한 새벽이에요. 창밖 풍경이 선명하고 설핏 노란빛이 감도네요. 잠시 비구름이 비꼈나 봅니다. 그곳은 어떤가요?


편지라면 안부를 건네는 목적이 커요. 꺼내지 못한 속엣말을 끄적이기도 하지만요. 매일 진심으로 그대의 안녕이 궁금해요. 밥은 잘 먹었는지, 잠은 잘 자고 일어났는지, 어떤 마음을 느끼는지.


오늘 일요일은 가족이 모이는 날이에요. 엄마 생신이 며칠 남지 않아 축하드리기 위해서지요. 이런 날 아니고야, 다 같이 얼굴 보기가 여간하지 않습니다. 벌써부터 반갑고 행복해요.


제겐 언니와 남동생이 있어요. 장녀와 잠남 사이 정의 내리기 어려운 둘째 딸이지요. 누가 나를 짓지 않으니 내가 '나'를 지으려 애를 썼어요. 어디서나, 어떤 상황에나 특정한 역할을 자처하는 식으로요. 


아무래도 가만히 있는 게 제일 어려웠어요. 집안일부터 짐꾼, 보모 역할을 도맡았어요. 아직 버릇이 남아 여전하지만. 새벽이면 엉덩이를 붙이고 명상하는 게 신기할 따름이에요. 이전의 저라면 그럴 시간에 집안일을 하거나 돈이 될만한 일을 찾았을 거예요. 


틈을 허용하지 못했어요. 촘촘하게 시간을 메꾸어야 했달까요. 멍하게 있다가도 퍼뜩 손에 잡히는 일을 하거나 궁리하는 겁니다. 시선은 언제나 바깥을 향해 있었으니까요.


내 안에 불안과 수치심을 보지 않으려고 앞만 보고 가는 겁니다. 그렇게 살면 나는 가치 있는 사람이 돼서 다시는 이런 감정을 마주할 일이 없을 거라고. 아마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삶을 빨리 감기 했어요. 어디로든 가면 뭐라도 있을 것처럼. 


그대로 달려갈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든 그러지 않든 이젠 알아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과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을요. 이젠 이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씹고 맛보고 즐기고 싶습니다.


언젠가 이 몸을 떠나는 날에 나를 최대한 누렸음을 감사하고 싶어요. 그 이상 바랄 게 없네요. 글을 쓰는 지금을, 입 안에 머금은 커피 향을, 새들의 노랫소리를 누리렵니다. 


숨 한 번 가득 채우고 찬찬히 내뱉을까요? 코와 입술 사이를 느껴도 좋고 숨소리를 들어도 좋아요. 배가 움직이는 것을 감각해 보세요. 가슴이 움직이고 있다면 가슴을요. 


그대가 잠시 생각에서 놓여나는 순간, 지금에 머무는 순간을 늘려가면 좋겠어요. 누군가에겐 하루가 다섯 시간만 같고, 누구에겐 48시간 일지도 몰라요. 눈 깜짝할 새 삶의 끝에 가는 일은 없으면 좋겠습니다. 풍성한 일요일 보내시길.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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