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아이는 선생님께 제출할 자기소개서와 진로계획서를 쓰면서 여러 번 한숨을 쉽니다. 특기란에 바이올린 연주를 적을까 하다가도 잘하는 게 아니라 안되겠다는 그 말에는 수많은 다른 말이 들어있는 듯합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며 요사이 부쩍 자신감을 잃은 큰 아이가 요즘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망했어"입니다. 놀고 있을 땐 공부가 걱정이고, 공부할 땐 자꾸 놀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집에서 버스로 30분 거리의 고등학교에 배정되었던 그때가 기억납니다. 600명이 넘는 학생들 중 10명 안팎의 아이들만 이 학교로 배정을 받았고, 아는 친구 하나 없던 낯선 교실의 서늘함과 마룻바닥의 비릿한 냄새가 지금도 선명합니다. 당시 저는 아무생각없이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성적만 믿고 별 노력을 하지 않았고, 뚜렷한 목표도 없었습니다. 1년은 중3의 실력으로 그럭저럭 상위권을 유지했지만, 2학년이 되면서 성적은 추락을 거듭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설마 내가 대학을 떨어지기야 하겠어?'라며, 책과 음악으로 회피하고 세상을 향해 욕을 퍼부었던 사춘기의 그 시절이 지금도 후회로 남습니다. 딱히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고, 기억에 남는 친구도 없습니다. 부모님은 가끔 우리 아이들에게 "너희 엄마는 사춘기도 없이 지나갔어. 학교에서 반장이니 회장이니 다 해오고... 엄마처럼만 해." 하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하죠. '안된다, 딸들아~ 엄마처럼은 안돼'
입학이 코앞으로 다가오니 하루에 10개도 넘는 공지사항이 쉴 새 없이 들어옵니다.
입학 안내, 기숙사 입소, 스쿨버스, 원격수업 줌 룸 넘버와 패스워드, 임시 시간표, 등교 안내, 급식 안내, 코로나 자가진단 참여 등 모든 것이 새롭게 세팅되고 있는데 아이들의 마음은 그것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입학식도 하기 전인데 이미 불안과 초조가 극에 달한 아이를 보고 있자니 걱정도 되고, 한편 스트레스를 좀 풀어야 할 텐데 싶어, "바람 쐬러 갈까?" 슬쩍 말을 걸어봅니다. 그런데 아이는 "내가 할게 얼마나 많은데... 엄마가 해 줄 것도 아니면서..."라며 선을 긋습니다.
오늘도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하는 큰 아이는 스마트폰에 탐닉 중입니다.
나 : 핸드폰 사용 시간이 좀 길어지네.
딸 : 나 지금 학교 동아리 찾아보고 있거든.
나 : 동아리는 뭐가 좋을지 결정했어?(이미 입학 전에 함께 얘기 나누고 선호를 결정했음에도)
딸 : 너무 많아서 뭘 할지 모르겠는데... 우선 5개는 대충 골라놨어. 그중에서 1순위, 2순위는... 자소서... (블라블라)
나 : 동아리 5개가 다 시간과 에너지를 엄청 쏟아야 하는 것들인데 괜찮겠어?
딸 : 왜? 내가 하고 싶다는데 엄마는 꼭 그렇게 말하더라.
나 : 아니 중학교 때도 너무 많은 활동 때문에 네가 힘들어했으니까... 그게 하나같이 에너지와 시간을 쏟아부어야 하는 것들이어서 네가 힘들어했던 게 생각나서 그런 건데...
딸 : 내가 알아서 할 거거든. 엄마는 신경 꺼.
나 : (대꾸도 못하고) '어라, 이게 아닌데...'
그리고 10분쯤 있다가 딸 아이가 내게 와서 다시 말을 겁니다.
딸 : 엄마, 근데 나 1순위, 2순위는 뭘로 할까?
나 : 니가 알아서 한다며...
딸 : 그래도 엄마 생각이 궁금하니까 그렇지.
나 : 친구들은 뭐 한대?
딸 : 애들이 그러는데 블로그 말고, 인스타 들어가면 정보가 더 많대. 나도 인스타 깔면 안 돼?
나 : 필요하면 깔아야겠지만 엄마 생각에는 블로그랑 별 차이 없을 거 같은데....
딸 : 그래도 깔래. 응?
나 : 대신 그건 알아둬. 네가 친구들 카톡 프로필 사진을 할 일 없이 들어가서 기웃거리는 시간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시간을 인스타에 쓰게 될 지도 모른다는거.
딸 : 나도 알거든. (깔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구시렁거리는 소리)
한참 있다가
딸 : 엄마, 인스타 깔았는데 별거 없더라.
나 : 그치?
딸 : 나 그냥 2G 폰 사주면 안 돼??
나 : ...............
딸 : 오늘은 왜 이렇게 공부하기가 싫지?
이런 말을 남기고 방으로 들어가는 딸아이의 뒤통수에 대고 "과연 오늘만?"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나오기 전 얼른 삼켜 버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