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겨울방학(봄방학 없이 장장 52일에 걸친)이 무척 지루하게 지나가던 어느 날, 작은 아이는 가족에게 선언하듯 말했습니다. 가족들이 나에 대해 얼마나 잘 아는지 시험을 보겠다고 말이죠. 일명 '사람관찰능력시험'. 우리는 모두 "그래, 재미있겠다. 어디 한 번 해보자!!" 하고 호기롭게 대꾸했지만, 내면의 소리는 '엄마가 돼서 꼴찌는 하지 말아야지' 하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작은 아이는 문제 출제를 고민하는 동안 제법 진지했으며 동시에 꽤나 신나 보였습니다. 제가 노트북 근처에만 가도 문제가 유출된다면서 온몸으로 화면을 가리고 멀리 떨어지라는 시늉을 했으니까요. 어떤 문제가 나올지 예측할 수 없는 상태에서 시험은 비교적 공정하게 치러졌습니다. 객관식 7개, 주관식 3개, 이렇게 모두 10개의 문제가 2장의 시험지에 나뉘어 출제되었습니다. 시험지를 진짜 그럴싸하게 만들었더라고요.
그중 가장 어려웠던 질문은 딸아이가 좋아하지 않았던 덕질남(중학생들의 날 것 그대로의 표현이니 읽기 불편하더라도 양해 바랍니다)을 물었던 것과 샤워하면서 듣는 노래가 아닌 것을 고르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나오는 연예인에 큰 관심이 없는 데다 딸아이가 좋아하는 남자 연예인은 평소에도 수시로 바뀌었기 때문에 고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선지 5개 중 '이 이름은 처음인데...'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먼산) 그러니 문제를 풀면서도 맞출 희망 따위는 감히 품지 못했습니다.
딸아이는 좋아하는 노래가 생기면 한 곡을 질릴 때까지 계속해서 듣는 편이라 문제를 읽을 때까지만 해도 맞출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지의 모든 노래는 평소 딸아이가 자주 즐겨 듣던 노래여서 순간 당황했습니다. '어, 이 중에서 특별히 샤워할 때만 들었던 노래?... 음...' 아무리 기억하려고 해도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그렇게 고민하는 사이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습니다.
문제를 풀고 있는 가족들을 관찰하며 딸아이는 무척 즐거워했습니다. 서로 떨어져 앉으라고 하고, 힐끔거리지도 못하게 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게 했으니까요. 서로 상의하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마치고 채점한 결과, 남편은 50점, 큰 아이는 80점, 저는 70점을 맞았습니다. 역시 자매지간은 남달랐습니다. 자려고 누워서도 종알종알 밤늦도록 이어지는 대화는 서로를 긴밀히 알아가는 데도, '사람관찰능력시험'에도 큰 도움이 된 것 같았습니다. 의외로 우리 세명이 모두 틀린 문제는 작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색깔을 묻는 문제였습니다. 어려서는 색연필을 고를 때도 무슨 색이 가장 좋은지 묻고 고르게 하고, 옷을 고를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크면서 같이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색깔을 물은일이없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딸아이가 구입하는 옷들이 온통 검은색 계열이니 저도 모르게 작은 아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검은색일 거라고 혼자 생각했던 것이죠.
가족이니까 모든 것을 다 알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면 저도 부모님과 동생들이 어느 계절을 가장 좋아하는지,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는지, 가장 좋아하는 과일과 음식은 무엇인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가족모임을 할 때도 12명 가족이 룸으로 들어가 식사할 수 있는 안락한 식당을 찾아 예약하기 바빴으니까요. '사람관찰능력시험' 덕분에 가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여하튼 딸들의 속마음을 센스 있게 알아차리는 딸바보 소리 듣는 남편이 이번 시험에서 가장 낮은 점수를 받은 덕분에 그나마 '엄마의 체면'은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석 달 전 가족과 함께 풀었던 시험지를 꺼내 보여주니 작은 아이가 빙긋이 웃습니다.
나 : 엄마 이때 시험 문제 풀 때 엄청 떨렸어. 엄마가 꼴찌 할까 봐. 그래도 엄마 체면이 있지.
딸 : 그래? 나는 재밌었는데... (낄낄) 난 언니가 1등 할 줄 알았어.
나 : 엄마는 우리 ○○이가 이렇게 기발한 문제를 낼 줄은 꿈에도 몰랐네.
딸 : (낄낄) 엄마가 못 맞출만한 문제를 내느라 내가 고민을 좀 했지.
나 : 그래? 고민한 보람이 있었네. 엄마는 너무 어려웠거든.
딸 : 그런데 난 우리 가족이 내가 좋아하는 색을 한 명도 못 맞출 거라는 건 진짜 예상 못 했어.
나 : 그러게... 엄마는 ○○이가 파란색을 좋아하는 줄은 꿈에도 몰랐네.
딸 : 내 친구들은 다 아는데... 나한테 관심 좀 가져. (낄낄)
나 : 반성 중... (웃음) 그런데 ○○아, 학교 선생님들도 시험 문제를 낼 때 딱 ○○이 마음일걸. 반 정도는 수업 시간에 가르쳐줬지만 집중해서 혹은 신경 써서 듣지 않으면 흘려버릴 문제, 반 정도는 '설마 이것도 모르려고... 이건 기본이지' 하는 문제로.
딸 : 그치.
나 : 그러니까 평소 수업 시간에 ○○이가 집중을 잘하는 게 아주 중요한 거야. 선생님은 계속 힌트를 흘리거든. ○○이가 그랬듯이 말이야.
딸 : .......
나 : 엄마가 70점 맞았을 때 ○○이는 기분은 어땠어?
딸 : 솔직히 예상했어. 내가 뭐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말을 잘 안 하니까.
나 : 그럼 수업 시간에 대답이나 질문 같은 거 안 하면 선생님들도 너희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지 잘 모를 수 있겠네?
딸 : 그렇겠지.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는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방법, 즉 수업의 주인공이 되는 방법은 '질문하는 것'입니다. 모르는 것이 있거나 이해가 잘되지 않는다면 숨기지 말고 수업 시간에 질문해야 합니다. 선생님은 질문을 통해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는지, 이해의 수준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질문에 대한 답을 할 때도 학생들에게 맞춰 조금 더 쉽게, 혹은 조금 더 많은 사례를 들어 자세히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짧은 대화지만 선생님의 입장도 되어보고, 질문의 중요성도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시험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에 몸이 아팠던 작은 아이에게 시험은 별게 아니라는 메세지를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저 역시 엄마 체면에 '딸이 낸 시험을 못 보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을 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더군요. 결국 시험은 딸아이가 직접 부딪쳐야 하는 경험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경험을 통한 통찰이 다음 시험에 대한 계획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부모는 적절한 타이밍에 질문하여 도움을 줄 수밖에 없을 것 같네요.
역지사지, 학생의 입장이 되어 시험을 치러본 경험을 하게 해 준 막내에게 오늘은 특별히 고맙다고 말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