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언니는 가정통신문 앱에서 '서울청소년의회 의원'을 모집한다는 공고(https://news.seoul.go.kr/welfare/?p=527158)를 보고, 중학생이 되는 딸이 뭐라도 해보길 바라는 마음에 슬쩍 권했다고 했습니다. 긍정의 대답을 기대하고 물어본 것은 아니었는데 순순히 해보겠다고 하니 급하게 연락을 한 것이지요. 저희 집 큰 아이가 자치구 어린이의회 의원, 모 신문사 학생 기자, 서울시 아동 명예시장 같은 굵직한 경험이 많아 얼른 생각이 났나 봅니다.
언니에게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아들과 3년 터울의 딸이 있습니다. 언니는 큰 아이가 4학년 1학기를 마칠 즈음, 목동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습니다. 첫아이는 부모가 되어 겪게 되는 온갖 시행착오의 첫 대상이기도 하지만 또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을 차지하는 첫 수혜자이기도 하죠. 교육 특구로의 이사는 언니가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 중 하나였던 게 분명했습니다.
묵동의 C 병원, 지금은 없어졌지만 우리는 그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몇 개월이세요?" 하며 물은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온 특별한 관계입니다. 조카 네 명의 고모였던 언니는 저보다 비록 한 살이 많았지만, 출산과 육아에 있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언니는 2월에 아들을, 저는 3월에 딸을 낳고 언니에게 참 많이 의지했었습니다. 밤중 수유가 어려울 때, 돌 무렵 아이가 고열에 시달릴 때도 언니 덕분에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었습니다. 제게는 엄마같이 든든한 존재였죠.
언니가 이사를 가기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목동으로 이사를 간 후부터 아들에 대한 걱정과 불만을 달고 살았습니다. 아이의 사춘기가 시작된 시기와 물린 영향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그곳의 교육 열기에 온몸을 데인 것 같았습니다. 핸드폰을 부수고 다시 사주는 일이 반복되었고, 학원을 넣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만두었다는 전화를 자주 받았습니다. 언니와 아이들의 관계가 점점 걱정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지켜본 언니의 아들은 레고 만들기의 천재였고, 나무젓가락과 고무줄만 있으면 무엇이든 뚝딱 만들어내는 손재주가 아주 좋은 아이였습니다. 엄마에게 과학상자를 사달라더니 친구 한 명과 함께 팀을 꾸려 과학탐구대회 결승까지 올라간 특별한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언니는 "그럼 뭐해, 결승에서 떨어진 걸" 하면서 결과만 갖고 이야기하더군요.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오빠의 모습을 보면서 작은 아이도 점점 닮아간다고 푸념하는 언니에게 어느 날 일침을 놓았습니다. 언니가 변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절대 바뀌지 않을 거라고 말이죠. 과정을 칭찬하고, 이유를 물어주고, 장점을 찾아주는 부모의 노력 없이 아이가 저절로 잘 클 수 없다고도 했습니다. 언니가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면 아이들도 언니를 다른 부모와 비교할 거라고 말했습니다. 좀 셌나요?
그날 이후 언니는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모가 그러는데..."라며 제가 해 준 두 아이의 장점도 자주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협박과 강제 대신 권유와 협상을 자주 시도했고, 아이들의 의견도 가급적 수용하려고 노력했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작은 아이부터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엄마의 권유에 '나 해볼게'로 응답한 것입니다.
아이들의 굳은 마음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단단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공감, 긍정과 칭찬의 말로 온몸이 흠뻑 젖게 해주세요. 차가운 바람에는 옷깃을 여미지만, 뜨거운 태양에는 옷을 벗듯 부모의 말에 온기가 담길수록 자녀는 마음의 빗장을 풀고부모에게 곁을 내어 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