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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라코알라 Aug 23. 2022

과학은 역시 할 게 못 돼.

모든 경험이 전부 아이에게 좋은 것이 아닐지라도...


조용히, 침묵한 채 학교가길 원하는 작은 아이를 태 차 안, 라디오만 신나게 떠들고 있습니다. 물음이 꼬리를 물면 짜증을 낼 것이 뻔하니 아침에는, 특히 월요일 아침에는 건드리지 않는 게 상책이지요. FM 91.9 MHz에 주파수를 맞추었더니 때마침 염규현 기자의 '키워드 뉴스'가 흘러나옵니다(요건 놓치면 좀 아까워요). 그런데 작은 아이가 닷없이 무언가를 막 읽어줍니다. 흔치 않은 일이기에 라디오를 끄고, 귀를 기울였습니다.


방학이 시작되기 전, 탐구발표대회를 나간다고 하면서 탐구 주제를 무엇으로 할까 고민하더군요. 얼핏 'e알리미'로 가정통신문을 확인했지만 권유는 하지 않았습니다. 사춘기 자녀에게 부모의 스리슬쩍 권유는 명령만큼의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 선한 의도에 비례하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모르지 않기 때문이죠. 그런데 친구와 둘이서 팀으로 대회를 나간다뭡니까? 과학 성적으로 봤을 땐 큰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이 좋으련만 이 녀석, 꼭 상을 타고야 말겠답니다.


모방이나 표절은 안 된다고 하니 자기들끼리 주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꽤 찾아서 읽어본 모양입니다. 작은 아이가 읽어준 실험 동기와 탐구 목표, 실험 설계와 연구 결과, 한계점과 보완점 등을 넣은 보고서는 얼추 틀을 갖추고 있었으니까요. 밥상머리에서 어뜩 나눈 이야기 주제를 잡고, 적합한 실험 환경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습니다. 특히 아빠와의 대화가 말이죠.


방학 동안 새벽 2시에 잠들고 아침 9시에 일어나는 패턴은 실험을 위해 필요한 것이었답니다. 수면의 질과 관련된 탐구 보고서라는 건 알았지만 밤낮으로 끼고 살았던 노트북 때문에 엄마의 오해와 간간이 쏟아지는 잔소리 폭탄을 감내해야 했지요.


등굣길에 작은 아이가 제게 보고서를 읽어준 이유는 '끝까지 해낸 것에 대한 칭찬'을 받고 였습니다. 아이가 상을 타보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밝혔을 때 "엄마는 우리 딸이 과학탐구 대회에 나간다고 마음먹은 거 자체가 무척 기분 좋은걸. 시도 자체로 이미 상 받은 것만큼이나 기뻐" 하고 얘기한 걸 아이가 기억한 분일까요? 오랜만에 침묵을 깬 등굣길은 월요병도 말끔히 밀어내는 것 같았습니다.


사춘기의 내 아이가 부모의 말에 귀를 반만 열어놓더라도, 아이가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적당히 넘어가는 게 필요해 보입니다. 그 과정이 비록 서툴고, 잦은 실수가 나온다 하더라도 잘한 점을 찾고(자녀가 클수록 매우 열심히 찾아야 칭찬거리가 생기는 건 안 비밀입니다), 의미 있는 노력에 대해 인정하고 칭찬하는 부모가 곁에 있다면 지독한 사춘기도 그럭저럭 잘 지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기네요.


보고서를 제출하고 홀가분해하는 딸아이에게 느낀 점을 물어보니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과학은 역시 할 게 못 돼.


딸아, 싫어하는 것을 아는 것도 좋아하는 것을 찾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단다.

과목으로 배우는 과학이 재미없고 어렵고 지루할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좋아해 보려고 시도한 노력과 도전의 경험은 모두 너의 것이 되었구나. 축하해.


이제 딸아이는 큰 인생의 강 앞에
마주하고 서 있나이다.
나는 그 강에 다리를 놓아줄 수도 없나이다.
그저 바라옵건대, 하느님.
저 어린 딸아이에게
언제나 절망하지 않는 큰 용기와
인내를 주어서 그 강을 무사히,
끝까지 건너가게 도와주소서.

故 최인호 작가의 「나의 딸의 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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