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 여아의 시점에서
경상도에서 자란 나는 제사 밥상머리에서 작은 시위를 해왔다.
친가 제사에서 남자 식구들이 제삿밥을 먹은 후, 여자식구들이 작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남자 식구들이 절을 하고, 할머니와 며느리들을 포함한 여자 식구들이 약식으로 절을 했다.
가장 고생해서 밥을 차린 여자들에게 주어진 개다리 소반에 차려진 밥상은 어딘가 약소했다. 어쩔 땐 제삿상에는 올라갔던 조기가 생략되었고, 어쩔 때는 각자 밥 그릇도 없이 한군데 나물을 넣고 얼기설기 비벼먹었다.
“가장 열심히 밥 한 사람이 대접받아야 하는 거 아냐? 조상님도 같은 생각일 껄?”
하는 물음표가 어린 나의 머릿속을 떠 다녔다.
그런 의문은 점차 내가 속한 경상도 집안에 대한 반항으로 발현되어 작은 1인 시위로 이어졌다.
그날 이후, 나는 제사를 지내면 항상 남자식구들이 앉은 큰 밥상에서 밥을 먹었고,
남자들이 절 할 때 꾸역꾸역 서서 절을 했다.
이 집안에서 여성 인권을 지킬 수 있는 움직임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야윈 오빠 옆에서 “오빠 밥 다 뺏어 먹는거 아냐?” 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제삿상에 올라갔던 가장 좋은 조기와 고기를 씩씩하게 먹었다.
그런 나에게 할머니와 엄마는 한 번도 전을 굽도록, 나물을 무치도록 시키지 않았다.
자신들은 평생을 준비해왔던 제삿상에 나는 손도 못 대도록 키웠다.
나의 손에 물을 묻히지 않았던 건, 그들이 할 수 있던 종류의 시위였는지 모른다.
그들은 그렇게 살아왔으나, 나에게는 그 삶의 굴레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폭싹 속았수다”에 예비 시어머니한테 숭늉을 못 뜬다고 “너는 장녀가 이런 것도 못 배웠니?” 구박받는 금명이를 대신해 숭늉을 푸며 엄마 애순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금명이 귀하고 아까워서 제가 안 가르쳤습니다.”
생각해보면 나는 우리집에서 금이야 옥이야 자란 금명이었다. 나 홀로 큰 식탁에서, 어느 하나의 반찬도 생략되지 않은 제삿상에서 할머니와 엄마의 젊음을 먹고 자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