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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희 Jul 17. 2023

자기 앞의 생

삼주 만에 독서모임을 하는 날이다. 모임시간이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는데 단체 카톡방이 조용했다.

사전에 변경된 일정을 공지했으면 좋으련만 바쁘다는 핑계로 그러지 못했다. 요즘은 예고 없이 불쑥 전화를 거는 것이 실례라던데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걸어도 될까. 한 주 미뤄진 모임을 놓쳤을 수도 있을 것 같아 회원 몇 명에게 전화를 했다.


모임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3명이었다. 참석 인원이 적어 한 주 더 미뤄야 할지 고민되었다.

“그냥 진행하죠.” 제일 마지막에 통화한 진 선생님이 결단을 내렸다.

자칫 싱거워 보일 수 있는 '그냥'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콕 박혔다. 그냥이라는 말이 이렇게 힘을 가지다니. 사람이 있네 없네를 따지지 말고 정해진 일은 정해놓은 시간에 해야 하는 것. 이토록 단순한 진리를 앞에 두고 나는 어쩌면 모임을 파할 핑계를 만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가장 멀리에서 오시는 선생님의 제안에 책을 들고 바로집을 나섰다. 사람이 적고 많은 것은 사실문제가 안 되었다. 단 두 명이라도 같은 책을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즐거운 일이니까.

이번 책은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이다.



우리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다. 어느 나라에서 태어날지 어떤 피부색을 가지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부모도 환경도 어느 것 하나 선택할 수 없이 태어나는 것이 운명이다. 슬프게도 세상에 나오는 순간부터 인생의 많은 부분은 이미 결정되어 있다.

탄생과 함께 자기 앞에 펼쳐지게 되는 삶. 그 삶이 어떤 형태가 되었든 내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굴곡지고 힘겨운 삶이라도 말이다.


여기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다. '자기 앞의 생'은 창녀의 아이로 태어나 부모에게 버려진 모모와 그를 돌보는 로자 아줌마의 이야기이다. 아랍인인 모모는 태어나자마자 모하메드, 회교도라는 이름과 종교만 적힌 종이 한 장만 달랑 남겨진 채 로자아줌마에게 맡겨진다. 출생 연도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학교에도 가지 못한다. 어느새 훌쩍 자란 모모는 이제는 나이가 들어 건강이 좋지 못한 로자 아줌마를, 그리고 자기처럼 버려진 아이들을 로자와 함께 돌본다. 모모는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

빅토르 위고의 책을 항상 끼고 다니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의 인생 멘토나 다름없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모모가 가여운 할아버지는 '사람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다'라고 거짓 대답을 한다.

하지만 모모는 알고 있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하밀 할아버지도 젊었을 때 사랑했던 여인을 떠올리며 지금까지도 행복해하니까.  


모모는 로자아줌마를 사랑하지만 이제 그녀는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로자를 대신해 누가 모모의 엄마가 되어 줄 수 있을까. 모모는 엄마가 되어줄 존재를, 자신을 사랑해 줄 존재와 자기가 사랑할 대상을 계속 찾아 헤맨다. 아직 모모는 사랑과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다. 그래서일까. 모모는 어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돌발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물건을 훔치고, 달리는 차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가로질러 가는 것을 즐긴다. 우스꽝스러운 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 돈을 벌기도 한다.


어느 날은 식료품 점에 들어가 달걀을 집어 호주머니 안에 슬쩍 넣었다. 이 광경을 본 여주인은 모모에게 관심을 표현하며 손에 달걀 하나를 더 쥐어준다.

손에 쥔 달걀 하나. 어쩌면 여기에 삶에 희망이 있지 않을까. 깨져버리기 쉬운 아슬아슬한 삶이라도 내 손안에 들어온 작은 희망을 놓지 말아야 한다.


모모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방법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시간을 거슬러 엄마를 만날 수 있다면, 로자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면. 생이 이렇게 슬프지 않을 텐데 말이다.


생이 얼마 남지 않은 로자는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극구 거부한다. 모모는 그녀의 안식처에서 그녀가 평온하게 삶을 마감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주가 지나고, 악취를 따라 지하실을 찾아들어온 사람들에 의해 죽은 로자 옆에 쓰러져 있는 모모가 발견된다. 모모는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 있다는 희망을 준

나탈리아의 집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모모 앞에 또 다른 생이 펼쳐지게 될까.

모모가 삶에 희망과 사랑을 가지기를.


삶을 사랑하라! 고 강조하던 로맹가리는 안타깝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자기 한계를 벗어나 더 자유롭게 쓰고자 했던  그는 삶을 사랑하려고 부단히 애쓰던 사람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삶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책 속에서 다양한 인종, 양성애자, 창녀를 비롯한 하층민들이 힘겨운 삶을 살아가지만 이들은 서로 연대한다.


버려진 아이들을 누군가는 돌봐주고, 이웃의 안위를 살피고,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을 보여준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 삶은 사랑으로 충만해지고 그 안에는 사람이 있다.

열네 살의 모모가 바라보는 삶을 읽으며 우리는 왠지 숙연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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