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를 하다 보면 처음에는 내가 이루고 싶은 한 가닥만 잡고 그거 잘되게 해 달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 잘되게 해달라고 빌다보면 다른 가닥도 필요하고 또 다른 가닥도 다 온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커진다.
그 바람이 커지다가 문득 바람의 사이즈가 커진다. 나 하나 잘되기 위해서는 나만 잘 되는 게 아니라 주변이 모두 좋아져야 한다는 것을 자각한다. 그렇게 바람의 기도, 원하는 것이 가득한 기도, 간절한 기도를 한참 이어서 하게 된다. 어쩔 땐 그중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또 그 이루어진 게 시들해지기도 하고 결과가 참 미미하기도 하다. 그렇게 빌고 비는 소원기도에서 오래 머물고 감정적으로 방황을 많이 하게 된다.
그렇게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막연하게 원하는 바는 없지만 그저 꾸준히 기도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노는 입에 염불을 한다.'는 말처럼 어차피 쉬는데 내가 당장 원하는 게 없어도 나중에 내가 뭔가를 바랄 때 금방 이뤄질 수 있게 하는 적금 같은 기도를 할 수 있다. 또 꼭 원하는 게 큼직하진 않지만 그저 하루하루 살아갈 때 액운만 피했으면 하는 마음에 기도를 하기도 한다. 그렇게 기도를 하다가 또 좀 지나게 된다.
기도를 늘 했던 사람은 기도를 안 하면 허전하고 뭔가 불안한 느낌도 든다. 그래서 습관처럼 양치하듯 기도를 한다. 그러다 그 염불을 하거나 사경을 할 때, 그 내용이 궁금하고 그 내용을 해석하고 싶어진다.
그러다 법문을 듣게 되고 법문을 듣다 보면 자연히 욕심이나 집착이 좀 떨어지게 된다.
그때는 뭔가를 이루기 위한 기도라기보다는 그 내용을 탐구하는 공부하는 기도로 바뀐다. 더 나은 선지식을 찾기도 하고 기도처를 찾게 된다. 잘 맞으면 쭉 이어지지만 초발심에 반짝 공부가 잘되다가도 법의 길이니 만큼 물어 가야 하는 곳이기에 헤매기도 한다.
온 세상에 좋은 절은 다 찾아다닌다. 순종적인 기도만 하다가 점점 종류도 다양해지고 여기저기 법문 순례, 성지 순례도 다닌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정말 운이 좋으면 또 좋은 도반을 만나 기도를 하는 주변 친구를 만날 수도 있고 마음에 꼭 맞는 좋은 스승을 만날 수도 있다.
불교공부가 깊어져 배우게 되든, 아예 배우지 않더라도 다 아는 가장 근원적인 진리는 태어난 것도 나 혼자, 죽을 때도 나 혼자 죽게 된다는 것이다.
공부하는 도반도 영원할 수 없고 어쩌다 운명처럼 만난 선지식에 의지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죽고 나서 기억에 남을 정도가 되려면 공부하는 분량과 인연의 공덕을 한참 쌓아야 가능한 것이다.
죽을 때는 내가 배웠던 영적 지식과 또 내가 그동안 남들에게 해왔던 모든 일의 업식을 호주머니에 넣고 죽게 된다. 그리고 영적 지식을 쌓은 만큼, 또 믿음의 깊이만큼 죽음의 여정을 떠나게 된다.
기도를 하다 보면 죽음과 죽음 너머에 잠시 생각하는 시간을 갖게 된다. 이건 부정적인 생각도 아니고 오히려 건설적으로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보는 습관이 된다. 그렇지만 이런 수행도 같이 수행하는 도반들이 얼마나 깊이가 있는지 얼마나 기도를 할 때 진지한 마음으로 임하는지에 따라 다르다.
마치 아이를 키울 때 큰 틀은 있지만 저마다의 신념이 있듯이 수행이야 말로 저마다의 신념대로 진리의 길을 걷는다. 누군가와 같이 공부한다거나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사실상 의미가 없다.
기도의 목적은 단순해야 한다. 또 기도하는 과정도 방식도 어느 정도 헤매었다면 하나를 꼭 쥐고서 깊이 있게 파는 연습을 해야 한다. 자신이 정말로 정직하게 순수하게 기도에서 수행으로 바뀔 때 그때마다 나타나는 선지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배울 수 있는 만큼, 소화할 수 있는 만큼 배우고 담아야 할 것이다.
나 스스로도 계속 점검해보고 있다. 나는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지.
맹목적인지 순수한 목적이 있는지 물어보게 된다.
중생 삶을 살면서 수행을 같이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수행만 보면 오롯이 뛰어야 하지만 중간중간 방해하는 것들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또 기도를 좀 하다 보면 꼭 경계가 찾아온다. 마장이라는 말도 쓰는데 기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나 사건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덕분에 나는 늘 수행했던 시간에서 새벽시간으로 옮겨야 했다. 강제로 새벽형 인간이 돼버렸다.
그럼에도 계속 수행을 하고 싶고 그 시간을 귀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24시간 중에 짧지만 가장 깊은 사유를 하고 가장 깊이 나를 들여다보고 고요한 공간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 하루를 살게 해 주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또 그때 진정으로 숨을 쉬고 있는 느낌이 든다.
수행을 지금보다 더 짜임새 있게 하려면 삶은 더 단조로워야 하고 삶을 루틴화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다음 주는 이번 주 보다 더 짜임새 있게 움직이고 더 단순하게 기도를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