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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사는가?

by 미니작업실

마음속에 가장 가치로운 것을 선별해 채워야 한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마음을 가지고 가치를 발견하며 산다는 건 에고 입장에서는 이 말은 죽어서야 알 수 있는 꿈같은 이야기이다.


정신이 온전하고 건강할 때는 이런 얘기가 너무 가볍게만 들린다는 것이다. 배울 수 있는 뇌와 건강한 장기가 살아있을 때는 그런 가르침이 들리지도 않는다.


정신이 온전하지 않고 아득해서 집중을 할 수 없을 때, 그때 사람은 중심에서부터 흔들리게 된다.

나라고 믿었던 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 형체가 온전하지 않아 지는 것처럼 내 생각도 기억도 추억도 애정하는 것도 점점 바스러져 사라진다.

자신이 바스러지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하루를 살게 된다.


사는 내내 가슴속에 자존심만을 담은 사람이 있었다. 체면, 자존심, 고집 등등으로 누가 봐도 자기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감정은 어찌나 들쑥달쑥인지 눈에 거슬리거나 화가 났다 하면 벼락같이 가슴에서 불이 났고 자신이 피해를 볼까 싶으면 심장은 얼음장같이 차가워졌고 입에서는 독화살이 마구 쏟아져 내렸다.

그러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세상 부지런하고 착한 사람이 돼 바른말 고운 말을 쓰면서 남들에게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조언까지 했다. 그 사람은 계속해서 다가가기는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 자신의 틀, 자신의 감정, 자신의 생각을 고집한 채로 그 안에서만 감정을 끓이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끈적한 사람이 되었으니 동정심에라도 찾아가 말이라도 붙일까 하면 금세 끈적함이 몸에 붙어 불편했다. 찐득하고 끈적이는 자아는 한동안은 바람이 불어도 비가 좀 와도 괜찮았다. 그런데 이렇게 영원할 것 같은 끈적임은 결국 버석하게 마르기 마련이다. 몇십 년이 흘렀으니 버석하기만 할 뿐 아니라 안으로는 그 표면을 간신히 유지하는 게 전부였고 언제 바스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일부가 소멸되고 사라지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비교적 젊다고 믿는 나도 장담할 수 없다. 난 삶을 두고 떠나기에 얼마나 준비된 영혼인지 알 길이 없다. 에고에게 죽음은 상상이 안 되는 무엇이다. 죽음과 결이 닿아있는 질병도 마찬가지다. 질병이 깊어질수록 죽음을 암시하는 불안함과 공포가 정서의 베이스로 깔린다. 우린 누군가가 질병에 걸리고 그 병마와 싸우고 이겨내고 때론 지기도 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나라면 괜찮을까?

내가 저 사람과 같은 상황이 오지 않으려면 무엇부터 준비해야 하나?

준비를 열심히 했다가 막상 죽음을 맞이했을 때 정말 기억을 할 수 있을까? 그땐 나의 영적 여정을 잘 마쳤다고 뿌듯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움켜쥐고 있는 게 움켜쥘 만 한가?

결국 나는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


어떤 피해의식 하나를 붙잡고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도 모르게 남과의 비교로 인해 피해망상에 감정을 허비하진 않는가?

결핍감을 확대해석해 더 이상 클 수 없다며 작은 쇠사슬을 차고 울고 있는 코끼리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은가?


질문하게 되고 돌아보게 된다.



자존심으로만 산다는 건 온전치 못하고 치우쳐서 살고 있다는 반증이다.

내가 가진 것을 드러내고 자랑하고 싶듯이 무언가를 특별히 가리고 싶어 하는 감정에서 시작된다.

그런 자신을 솔직하게 발견하기만 해도 자존심은 약해지고 성숙하고 긍정적인 자아가 자라게 된다.

밝고 긍정적인 눈으로 바라본 자신에게 무엇을 채워야 하는지 보이기 마련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나요? 결국 나 자신은 어떤 동기로 살아가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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