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을 버려라. '
'집착을 버려라. '
부처님의 말씀은 다 새겨들어야 할 말씀이지만 그중에 단연 꼽으라면 저 두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욕심을 다른 말로 내 뜻대로 하고 싶어 하는 의도라면 집착은 그 욕심의 농도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사람은 저마다 적절한 이타심과 적절한 이기심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느 순간 자기 이기심으로 기울어진 의도는 민감한 타인들은 금방 눈치를 챈다.
그런 이기심의 의도로 판을 움직이려 하거나 조종하려 들면 마치 태풍의 눈처럼 주위의 기류가 흔들린다. 그리고 직감이 빠른 사람들은 기류가 흔들리고 자꾸 그 의도대로 빨려 들어가는 불편감을 계속 느끼게 된다.
좀 센 예시라면 다들 평균치의 소음으로 지나다니고 있는데 누군가 큰 소리를 내고 고함을 지르면 저절로 시선과 귀가 그쪽으로 향한다. 당사자들은 스스로가 욕심과 집착으로 둘러 쌓여 화까지 내는 거라 못 느끼지만 주변 사람들이 그 파장을 느끼고 같이 괴롭게 된다.
그 화를 세게 내지 않더라도 스스로가 계속 자신의 의도를 고집하는 것도 이런 비슷한 파장을 일으킨다.
누군가가 어떤 물건, 재물, 자산에 욕심을 내거나 사람관계에 욕심을 내거나 특정한 상황에 자신이 드러나길 욕심내거나 특정 감정(우울함, 무기력증, 피해의식)에 욕심내거나 집착하면 저절로 울퉁불퉁한 감정을 주변사람들이 알게 된다.
아무리 감춰도 그런 의도는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욕심과 집착이 많은 사람들은 주변에 어지러운 파장을 계속 주기 때문에 그 어지러움을 뚫을 만큼 심지가 강한 사람이 곁에 있거나 그 어지러움이 자신의 삶과 너무 닮아서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혹은 평범한 사람들도 결국은 어지러운 파장에 잔뜩 예민한 상태로 이기심을 같이 세운채 만나게 된다.
태풍을 만드는 당사자의 의도 자체가 이기심에서 시작했기 때문이다.
피해의식이 강한 지인이 있었다. 그 지인은 피해의식을 욕심부렸다. 피해의식을 계속 쥐고 있으면 모두가 귀 기울여주고 다 이해해 주고받아주니 그걸 너무 집착해 버렸다. 결국 자신만 빼고 모두가 가해자라는 결론을 쥐고 자신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결국 사람들은 다 알아버렸다. 가해자라고 지목한 사람들도 처음에는 미안해하다가 결국 그 조종하는 장치를 알아버린 것이다. 그렇게까지 수고롭게 누군가에게 정성을 들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정성 들일 시간이 없는 게 맞을 것이다.
태풍과 폭풍은 강하고 피해를 끼치지만 본인들도 한정된 시간에만 힘을 쓸 수 있다. 처음에는 돌변하는 날씨에 공포를 느꼈다가 배운 사람들은 대처할 방패를 열심히 만들며 집을 지킬 뿐이다.
결국 욕심이 욕심인지 알고 집착이 집착인줄 알게 되길 바랄 뿐이다.
어제 보다 오늘 더 가벼워지길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