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비

by 미니작업실

날도 화창하고 일상도 그럭저럭 잘 지나가고 있었다. 거울을 들여다보면 조금 더 찌든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이지만 노화는 피부뿐 아니라 시력에도 찾아오는지 질끈 감았다 뜨면 또 평범해 보인다. 그렇게 평범한 하루였지만 내 마음속에 쌓아둔 불편함이 쿡쿡 여기저기 찾아왔다.

우울감이라기에는 비교적 잘 먹고 잘 잔다.

다만 화병 같은 증상이 찾아왔고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이 많아져서 힘들면 툭 버리면 되는데 집착하듯 쥐고 있었다. 아니 쥐지 않아도 계속 곁에 떠올라 함께 있었다.


변비였다.



감정적으로 해소되지 않은 쓰레기가 여기저기 쌓여 또 몸으로 풀고 있었다.


감정은 신호를 보낸다. 자신을 알아주고 풀어달라고.

가장 큰 특징은 본질을 직면하지 못하고 감추는 방식을 찾아 회피한다.

자극적이고 과격한 내용의 콘텐츠를 즐기게 된다.

알코올섭취가 늘었다.

맵고 자극적인 음식이 당긴다.

머리로는 알고 있다. 몸에 안 좋다는 거.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음식이라도 먹어야 살 거 같다.

더 이상 참아지지 않는 포인트가 많아진 것이다. 사람들도 어떤 상황도 어떤 사건도 예전처럼 그저 넘어가지지 않았다.

상대방도 문제지만 그걸 보는 나도 더 이상 여유가 없어진 것이다.


이렇게 또 쌓아두고 아닌 척 편한 척했다.

트림도 나오지 않았고 방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소화되지 않은 감정도 많았고 냉동식품처럼 그대로 풀지도 않고 꿀떡 삼킨 사건도 많았다.


소화불량에 오랜 변비로 곪아왔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40 춘기 지났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침묵했다. 그런데 그다음 해, 그다음 해에도 삶은 내게 계속해서 질문을 하고 성장했는지 얼마나 영민해졌는지 기습 공격을 퍼붓는다.

그때마다 다 풀었다고 안심했던 부분마저 여기저기 보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변비가 문제가 아니라 그 독을 온몸으로 껴안으면서 내가 화가 많아진 것이다.






이번 여름휴가는 휴양의 목적으로 조용한 태백산골 동네에 오게 됐다.

태백 쪽으로 가는 길 지난번 화마 사건으로 뒤덮인 산등성이를 마주했다. 마침 해가 지는 석양과 역광으로 등지고 있어 자연스럽게 어두워 보였다. 그래도 확연히 드러났다.

저녁 노을빛 사이로 화마로 수묵화가 입체적으로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자세히 보니 아주 낮고 작지만 풀들이 아래에 감싸주고 있었다. 숯덩이가 된 나무들이 너무 강해서 잘 보이지 않았고 그 작은 풀들이 못 닿은 곳도 있었다. 그래도 분명히 연둣빛 새싹이었다.


나도 우리도 저렇게 그저 하루분량을 잘 해내면 될 것 같았다. 타버린 산등성이를 위로하면서 그 와중에 감정이입이 된 나는 저절로 응원이 나왔다.

오늘만 걷자. 나를 다른 사람처럼 만들려는 불편한 감정에 휘둘리지 말자. 그러든지 말든지 오늘은 맑은 새싹을 틔워보자.


그렇게 새로운 능선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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