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일에는 성과라는 걸 운운하기가 참 어려운 장르이다. 그 집착과 애증이 얼마나 끈적한지 나의 오래된 열등감이 되어 나를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했다. 나는 나의 때가 오기를 갈망했다. 그런데 그때를 기다리면서도 묘하게 나만의 고집이 있었다.
"나는 전시를 너무 하고 싶지만 흉내 내고 싶지 않아~"
"나는 딱 나다운 미적 기준을 갖고 싶어~"
자존심이라고 생각해 버리기로 하자 시간이 지나도 뚜렷해지는 원에 가까웠다.
오늘은 하루 종일 멍한 하루였다. 난 내가 갈망하던 일이 현실로 이뤄지면 나는 좀 바보가 된다. 이건 내가 나를 살펴보면서 발견한 특이한 점이다. 세상 최고로 어리바리해지고 들리는 말이나 여러 가지 상황이 내가 상상한 이상으로 이루어지고 그 결과가 현실로 입체로 보이기 시작하면 현기증 같은 게 일어난다. 쓰러지진 않지만 그냥 멍한 상태가 된다.
나는 자존감을 스스로 짜내어 나에게 살을 붙이는 삶을 오래 살았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경험은 어쩌다 조금씩 모아 온 셀프식 자존감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저절로 나에게 수혈되는 듯한 몽롱한 기분에 빠지게 되었다. 이건 쾌락이 아니다. 들뜨지 않는 기분 좋은 느낌이다.
D.P 하기 전 벽과 조명을 기다리는 내 그림들
상상했던 일이 손으로 만져지는 순간, 그 일의 부피감에 압도되어 감정이 멍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리고 긴장이 풀리면서 그동안 내가 쥐었던 그 상상의 무게에 대해 되돌아보게 되었다. 눈앞에 보이고 만져지는 순간, 그 현실의 크기와 상관없이 생각의 무게를 따지자면 실제가 훨씬 가볍고 너무나 산뜻했다.
나의 상상 속에서는 정말 많은 미로를 만들고 생각으로 얼마나 허무맹랑하고 어려운지에 대해 논박하기를 좋아했다. 좋아했다기보다는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장 쉬운 방법이었다.
나는 상상하고 공상하고 스토리를 이어가는 것을 지금도 좋아한다.
그런데 그 주인공이 내가 되는 순간 예전보다 복잡한 이기심과 좋은 결과에 대한 집착으로 일그러지고 뒤틀린다. 자꾸 순위가 더 신경 쓰이고 옆과 뒤가 보인다. 그리고 점점 내 앞으로 순서와 상관없이 뒤죽박죽이 되어갈 때가 있다.
난 이제 다른 사람이 보이는 게 아니다.
안 하는 나를 ‘내가 보고 있다.’
타인과의 약속은 우선순위로 지키면서도 ‘나와의 약속’은 차일피일 미룬다.
그런 나를 ‘내가 보고 있다.’
나는 세상에 가장 무서운 cctv는 자신이 마음먹은 것과 생각을 관찰하는 ‘그 눈’이라고 생각한다.
내면의 부모님일 수도 있다. 또 나를 검열하는 속박으로서의 나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속박이라고 인정해도 내가 나에게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부지런해야 한다는 걸 뼛속 깊이 너무 잘 알고 있다는 거였다.
더 이상 내면 아이에게 너무 많은 짐을 떠넘기지 않기로 했다.
그 아이가 울기만 바래서는 안 되었다. 그 아이가 울고 난 뒤 다음 길을 안내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60대에서 보면 너무 어린 내면 아이이다. 만 3세에 형성되지 않은 정서로 그 내면 아이로 지금껏 울었다면 그다음의 시간엔 나의 선택이 있다. 그 이상으로 살아왔던 그 겹을 따지자면 60대에서 본 나의 30대는 아직 내면 아이만큼이나 어리다.
나의 세 살 딸아이가 꿈꾸는 꿈이 뭘까? ‘뽀로로 오래 보기?’, ‘엄마, 아빠 사랑을 온전히 독점하기?’, ‘과자 좀 더 먹기?’ 정도가 아닐까? 내가 꾸는 꿈도 신의 눈에서 본다면 딱 그 정도의 무게가 아닐까? 그땐 너무 어려서 안된다고 했지만 지금은 언제든 해도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