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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작업실 Jun 28. 2020

기억의 소강

엄마의 작업실




나보다 띠동갑 이상으로 많았던 선생님이 계셨다.

그때 당시 그분의 어머님이 뇌출혈로 힘들어하시다가 결국 임종하시는 과정을 그분의 가장 옆에서 지켜보았다. 그분은 자신이 평생 수집해온 자존감을 부여잡고 부모님에 대한 그동안의 원망과 애달픈 감정, 온갖 양가감정의 분수토와 함께 내적 투쟁을 겪고 있었다. 심지어 자신이 결혼을 약속했던 애인마저 그 상황을 책임지기 싫다며 떠나갔다. 그렇게 그분은 오롯이 아픔을 맞이해야 했다.



그때 그분 옆에 있었다. 사실 나뿐 아니라 그분 옆에는 그분을 아끼는 누군가가 다 있었을 것이다.

그분은 거의 실신할 것처럼 정서적으로 힘든 상황이었는데 그 감정이 아무리 숨겨도 숨겨지지 않았다. 일을 하려고 애써도 곧장 일이 잘 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과 일로 해소하려고 해도 그게 잘 될 리 없었다. 옆에서 같이 일하는 선생님들도 그분의 사회적인 일처리에 너무 힘들어했다.

그 수습은 내가 다 마무리했다. 

그때 하필 자신이랑 가까운 친구마저 자살을 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고 한다. 

그분에게 일처리 못한다고 일을 그만두게 하자는 동료들과 계속 설득해야 했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시간이 있으니까. 



나는 심리 책을 꾸준히 보면서 공부해야 할 나만의 과제가 있었다. 

에너지 뱀파이어를 끊어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끔 의도하지 않게 자신도 모르게 에너지 뱀파이어가 되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런 순간 


그 사람을 떨쳐낼 수 있을까?
밀어내면 될까?
버리면 될까?




내 옆에서 정말 잘 지내던 사람이 내가 보기엔 너무나 멋진 에너지를 가졌던 사람이 한순간에 어떤 불행이 닥쳤을 때 그때 그 사람을 떨쳐낼까? 

그 사람이 하는 말이 모두 에너지를 고갈시키는 말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런 어두운 시간터널은 누구나 한 번쯤 거치게 된다. 



내게 너무도 가까이에서 그렇게 검은 오라를 풍기며 힘든 일을 겪은 사람이 지나갔다. 그 사람을 무시할까? 그때 내가 했던 방법은 그냥 옆에 있으면서 일상의 얘기를 하는 거였다. 그 감정을 너무 깊이 공감하지만 내가 그 사람보다 상황적으로 더 낫다는 마음과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주는 건 절대 조심해야 할 마음이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일상적인 얘기를 해드렸고 그 힘든 얘기도 그냥 그런 일상인 것처럼 들어드렸다.




일상의 결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런 주기적인 인간적 흐름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성격적 결함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 사람의 감정을 흐름으로 봐주어야 한다.

그때 누군가의 힘듦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는 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처절히 느꼈다. 그 괴롭다는 게 단지 불편감이나 불행의 느낌이 아니라 슬픔의 다양한 종류와 그 디테일함에 놀랬다.



이런 감정이라는 게 있다니 그런 마음이었다.



그때의 슬픔을 담아 그려보았다.


나는 집에 와 그분의 감정을 내 것처럼 울었던 것 같다. 인간이면 겪을 법한 수많은 이별 중 자식과 부모와의 이별만큼 가슴 아프고 많은 영적 자각을 주는 경험은 없는 것 같다.

정신세계는 눈에 보이는 생생한 이 모든 게 모두 꿈이고 허상이라는 그 허무한 진리도 그 순간에서 만큼은 오히려 그 슬픈 감정에 푹 빠져버리는 게 오히려 진짜에 가깝다고 여겼다. 



그 시간을 지나 나의 걱정과 다르게 어머니와의 이별을 거치고 그분은 다시 안전지대로 올라갔다.


또 그분의 필요를 원하는 일상이 밀려와 그 귀찮은 반복이 아이러니하게 또 위로를 주고 그 위로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이 될 것이다.


수많은 기억과 분위기, 이야기가 나의 공간을 다녀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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