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내 가드닝을 하면서 더더욱 불완전함에 대해서 다양한 시각을 가지게 된 게 참 좋다. 바쁘게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는 마음과 달리 식물의 성장은 느린 듯 빠르고 빠른 듯 하지만 기다려주고 바라봐주어야 한다. 성장이 유독 느려지거나 가지가 말라가거나 할 때는 조금 귀찮지만 화분 전체를 엎어봐야 하는 대수술이 필요하다. 지난번에 언급한 장미가 그랬었다. 장미는 단단한 줄기를 한 모종에 심어 묶음처럼 판매를 한다. 다른 종류는 한 대로도 큼직한 친구도 있지만 우리 집은 실내 가드닝을 해야 해서 그에 맞게 제일 작은 품종으로 들여왔다. 생각보다 진딧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여러 가지 중에 두 가지가 점점 검어졌다. 물이 많은 것도 아니고 흙이 오래된 것도 아닌데 그랬다.
대수술을 감행했는데 뿌리 가까이 가니 뿌리 파리 공격으로 애벌레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는 뿌리에 붙어있는 흙을 물로 씻어 털어내고 앙상하게 숨만 쉬는 뿌리를 살릴 수 있었다. 줄기가 검게 변한 아이는 이미 뿌리도 명을 다 해 오히려 해충의 집이 되어있었다. 기다려주면 살아날 거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옆에 있던 건강한 화초마저 죽일뻔해서 여러모로 배운 점이 많았다. 살충제도 뿌리고 여러 방법으로 해충을 없애는 보호 장치를 해두고 다시 영양제와 함께 흙을 덮어주었다. 정말 신기하게 그때부터 쭉쭉 살아나기 시작했다. 당연히 내년에야 볼 수 있을까 했던 꽃도 바로 보여주었다.
그때부터 무작정 화초에게 꽃만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정말 다양한 곳에서 공격받지는 않는지 살펴보는 습관이 생겼다. 살아있는 생명임을 입체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흙을 바꾸면서 화분도 가볍고 통기가 잘 되는 것으로 바꿔 주었다. 지금도 돌아서면 건강하고 새로운 잎을 보여줘서 참 기특한 마음이 든다.
나의 경우도 장미와 닮았던 적이 있었다. 아무리 새 잎을 내려고 애써도 새 잎은커녕 숨조차 쉬기 힘들 때가 있었다. 돌아보면 그때는 장미처럼 질이 나쁜 사람들과 어쩔 수 없이 같이 있어야 했다. 질이 나쁜 말을 옮겨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 그뿐일까? 상황이 안 좋아지려고 하면 내가 공들여 사뒀던 화분마저 바꿔야 한다는 자각을 하게 된다. 통으로 다 바꾸기에는 왠지 귀찮고 늦은 것만 같을 때가 있다. 내가 금이야 옥이야 움켜쥐었던 흙마저도 오염돼 있다면 과연 나는 새 잎을 안 내고 있는 것일까? 못 내고 있는 것일까?
무엇을 열심히 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당신을 탓하지 말자. 당신은 그 속에서도 충분히 잘했다.
내 마음속 그림자가 계속 커져 신호를 보내고 심지어 꽃을 피울 때는 숨겨둔 상처를 바라볼 때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난 시절에 실수하고 억울하고 아팠던 기억이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들여다보기에 힘들어 어떤 과거는 덮어놓고 그저 잘 아물기만을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왜 새 살이 돋아나지 않냐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다른 방법을 써보자고 나를 설득하기도 하고 누구나 아픔은 있고 시련은 있는 거라고 나약한 마음이 올라올 때면 되려 곱씹는 나를 질책했던 적도 많았다.
안 좋은 기억은 썩어서 자양분으로 쓰기에는 건강한 뿌리와 맞닿은 그 흙이 너무 가까울 때가 있다. 썩어가는 그 가스와 해충을 온몸으로 받아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억은 마치 추억처럼 포장하고 싶을 때도 있다. 그것으로부터 배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해서 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아픔으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부분은 맞지만 그때의 아픔과 슬픔은 있는 그대로 아파해야 할 일이 맞고 슬퍼해야 할 일이 맞다. 어떤 일이 계속 기억이 난다면 충분히 시간을 내어 아파하는 시간을 갖기를 바란다. 슬퍼하는 시간을 갖고 보듬어주자.
대체로 잊히지 않는 불편한 마음은 억울함이 많다. 있는 그대로 내 감정을 믿어주자. 맞고 틀리고는 이 감정이 해소되었을 때, 충분히 잘잘못을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긴다.
괜찮은 척했던 힘을 빼고 온전히 내편이 되어 울어주고 같이 슬퍼하고 화내보자.
함께 울어준 나는, 온전히 내편이 되어 진심으로 웃음이 피어날 곳으로 안내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