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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작업실 Jun 18. 2024

너울성 그대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잔잔한 파도를 바라보며 일상을 살고 있다.

때로는

내가 계획한 대로 살고 있다는 느낌으로.

내가 의지를 다해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내가 기도한 대로의 삶을 살고 있다는 믿음으로 삶을 살아내게 된다.


이런 일상을 덮쳐버리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사회적 이슈나 일상에서도 공공연히 드러나 있고 공연, 드라마, 영화 등등 인기 있는 곳에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가 있다.

'바람'이다.


이를 칭하는 수많은 언어 중에 '바람'이라는 단어선택은 정말 탁월한 작명이라는 생각을 한다.


 '바람'이라는 소재는 다양한 감정선을 가지고 있다. 감정선뿐일까?

대를 잇는 양심의 선, 도덕성에 대한 교육 정도, 결혼이라는 제도에 대한 이해, 이타심의 깊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좀 무겁게 범죄적 접근도 있었다. 바람을 미끼로 이용해 복잡해지는 바람의 종류도 있고 그 이상의 복잡하고 무거운 바람은 거론할 필요도 없이 수많은 매체에 보도된다.

 


이번주 내게 찾아온 마음공부 미션은 범죄까지는 연루된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을 배신하는 마음과 죄책감의 마음의 끝판왕 '바람'이다.

사실 이 주제는 번번이 나에게 찾아왔지만 딱히 '내가 어떤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게 좋을까?'미루고 있었다. 매체에서 계속 언급되긴 했어도 항상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었기에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입장이 전부였다.


예전에도 관계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학생 들 중 바람으로 집안이 무너져 힘들어하는 상황을 본 적이 있긴 했었다. 40줄에 들어서자 점점 모든 다양한 스토리들이 생생해졌다. 이제는 먼발치의 희생자로서가 아니라 이제 비슷한 동년배의 가까운 거리에서 바람을 피워 피해를 주고 피해를 받는 지인의 가족을 목격하고 남녀 양쪽 다 친분이 있는 나로서는 매우 어렵고 불편한 마음이 생겼다.

그리고 나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어떤 마음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야 할까 제정비하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정말로 바람이었다. 바람은 꼭 당사자들에게만 느껴지고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었다. 그 주변에서도 진동이 느껴지고 그 여파가 느껴졌다. 나는 제삼자인데도 그 바람에 눈이 멀어 일상에 집중되지 않고 둥둥 떠다니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상처받은 피해자 가족들의 배신감은 더 위로해 마지않지만 그녀를 혹은 그녀의 가족들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당사자에게 의문을 가졌다. 왜냐하면 경제적으로나 여러 부분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쉬움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겉으로 볼 때는 그랬다.


"도대체 왜?"

"어떻게 그래?"

"어떻게 그렇게 뻔뻔할 수 있어?"


적어도 내게 도전받았던 마음공부의 재료는 원래 가족에 대해 아쉽거나 미워서 찾아온 바람의 감정이 아니었다. 양쪽 다 모든 가족관계를 알아온 터라 수많은 얘기를 나눴나로서는 매우 흥미로운 마음상태를 듣게 됐다. 이 관계는 중독적이고 매우 어쩔 수 없는 운명적인 관계라는 것이었다.

 이 말인즉슨 일상을 평범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도파민을 자극하는 일탈의 맛은 스스로가 20대로 돌아가는 감정을 느꼈고 살아있다는 느낌은 분명히 불편하지만 너무나 선명하고 달콤해 끊을 없는 중독적인 관계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바람을 피우는 지인은 평소 그런 사회적 기사를 봤을 때 피를 토하며 욕했던 사람이라 더 충격이었다.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안 서고 계속 그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끌려다녔다. 평소처럼 지내던 실제 가족들의 말과 행동도 자신의 죄책감을 덜어내듯이 탓을 했다.


 사람이라면 한 번쯤 혹은 만 번쯤 충동적인 감정을 느낄 수는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연예사업은 유사 연애감정을 이용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이기에 합법적인 덕질을 살펴보자면 충동에 자유롭지 못한 우리들의 마음을 대놓고 인정하고 대변한다.


그런데 그런 충동적이고 개인적인 감정을 확인하는 것과 감정에 휘둘려 행동으로 보이는 것은 하늘과 땅과 같이 천지 차이이다.

내가 컵을 들고 탁자에 앉아 물을 한잔 마신다고 가정해 보자. 그 탁자랑 바닥은 같은 평면이긴 하지만 동일한 공간이 아닌데 마치 물 잔을 바닥에 두어도 괜찮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마치 이 공간에서 저기로 찻잔을 바꾸는 게 무슨 큰 죄가 되겠어? 같은 평면인데?

이런 착각을 하게 되는 것 같았다.

적어도 자신은 그 사각지대에서 들키지 않을 거라는 안심을 하는 것 같았다.

사람이 자신이 나쁘다고 생각한다면 그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쉽게 넘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도 될 것 같은 착각이 생기고 이 정도는 충분히 가려질 거라 믿는 것이다. 이 정도의 일탈은 삶의 재미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판단력이 흐려져 자신이 어린 시절의 철부지, 사랑받지 못하고 매번 실패했던 연애사를 떠올리면 지금 같은 완벽한 도전거리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은 그때보다 여유 있고 사회적 책임?을 이뤄뒀고 그래도 된다는 매너리즘으로 젖어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든든한 가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든든함으로 생긴 여유로 새로운 연애를 하는 것이었다. 맑은 눈의 광인처럼 의도가 참 순수했다것이다. 순수한 의도에 너무 많이 배신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해자의 흘린 눈물이 아까울 정도였다.


또 하나 저 바람난 둘 사이에 일탈은 있지만 '일상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나는 연예인들은 생리적 현상을 겪지 않을 거라는 순수한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항상 예쁘고 멋있고 맑은 이슬만 먹고살 것 같다는 착각말이다. 바람에 휘둘린 사람들은 그 순수함이 어린 시절, 나의 무지함과 닮아있었다.

일상 속에는 달달한 꽃향만 낼 수 없다. 모든 희로애락이 녹아있고 서로의 모든 치부를 드러내게 된다. 특히나 가족들의 결합은 더더욱 입체적으로 좋기도 하고 입체적으로 괴로운 지점이 되기도 한다.

결혼의 형태라는 것은 마치 벌집처럼 형태는 있어도 한순간 부서질 수도 있을 만큼 참 많은 허점을 가졌다.

그 허점을 서로 알지만 지켜주는 믿음이 있는 곳이 적어도 살기 편하고 서로 행복할 것 같다.

자유로움을 허용하고 모든 남녀가 같은 공간에 있으면 언제나 바람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어떻게 사회가 이뤄질 수 있을까? 정말 그 정도로 충동적으로 살기로 작정했다면 왜 인간이 되었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인간이라면 기꺼이 선택적으로 속박받으며 살기를 바라고 태어났을 것이다. 정도 안에서의 자유로움이 진정한 안심으로 이끈다고 믿는다.


지금 내게 익숙한 그녀, 혹은 그를 매우 한정된 시간에 잘 차려입고 매너를 갖추고 특정한 곳에서만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달라질까? 지금 만나는 그녀도 일상성이 없는 만남이기에 가능한 신기루 같았을 것이다. 진실은 가족을 이뤘던 그도 그녀도 그렇게 신기루처럼 만나 진짜 오아시스가 되어 정착하며 살았다. 그런데 바람이 난 것이다. 이 불안정함을 행복이라고 믿게 되는 심리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미안함의 경계선, 양심의 경계선이 매우 낮다는 것이다. 나이를 잊고 청춘이 된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난 것이다. 시공간을 인지하지 못하는 착각이 들만큼 충동적인 뇌만 쓰고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현실성이 없었다. 오히려 현실에서는 할 수 없는 걸 너무나 거침없이 해냈다. 모든 게 가능할 거 같은 착각이 든다. 자기 생각에는 자기 세상에는 그렇게 사는 것이 맞기 때문이다.



'바람'이라는 특성상 움직일 수밖에 없다. 자신의 마음이 흔들렸던 것처럼 상대도 나와 늘 같을 수 없고 그 집착은 서로 누가 강한지는 움직여봐야 알 수 있다. 바람이 난 상대가 나와 같이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된 산들바람정도의 바람인지 내가 밟고 있는 바닥까지 날려갈 바람인지는 예측할 수 없다. 자신 또한 지금 정도로 만족할 사람인지 더 끝을 봐야 끝날 사람인지 살아봐야 알 일이다.

단지 두 사람뿐이면 이 정도인데 엮인 양측 가족들의 애증까지 예측해 보면 보통 정신으로는 바람을 피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혼을 한다면 적어도 자신의 마음, 감정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자신이 충동적인 감정인지, 충분한 생각에서 나온 결론인지 알아차려야 한다.

행동을 하지 않는 것도 행동이다.

모든 씨앗이 싹을 낼 필요도 없을뿐더러 봉오리까지 맺힌 꽃송이 까지가 제일 예쁜 꽃도 있다.

예전에 봤던 '마틴 스콜세이지 감독의 '순수의 시대'를 아련하게 본 기억이 있다. 이 영화는 뻔한 바람의 주제를 이용하긴 했지만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다 피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딱 그만큼이 아름다운 사랑도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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