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미니작업실 Jun 04. 2024

오후 12시를 기억해!

자신감에 햇빛샤워 하기

어제도 오늘도 어김없이 아침이 되면 식물들을 위해 커튼을 열어준다.

처음에는 빛이 들어오나 싶다가 어느 순간 어느 화분도 소외되지 않고 골고루 빛으로 샤워할 수 있다. 그 모습을 보자면 꽃이며 잎사귀며 어느거 하나 반짝이지 않는 게 없다. 다 아름답고 저절로 꽃 멍을 즐기게 되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그렇게 햇빛을 듬뿍 받은 식물들은 저마다 품었던 새로운 가지를 내고 숨겨뒀던 봉우리를 보여준다.

햇빛을 보자면 적어도 화초에게는 사랑 자체라는 생각이 든다. 다른 조건이 척박하다 할지라도 빛이 좋다면 나머지는 식물이 알아서 적응을 하는 경우를 참 많이 보게 된다.

빛이라는 것은 내게는 사랑의 다른 이름같이 느껴질 정도로 유사한 점이 많다.

절대적인 사랑이라는 단어를 이미지로 떠올릴 때, 무한대로 쏟아지는 빛이 자연스럽게 연상되곤 한다. 물이라면 생명의 대명사로 느껴지고 화초는 마치 지구에 살고 있는 우리들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렇게 내 마음을 반영해서 대입하게 되는 거 같다. 거의 죽어가던 장미가 새로운 잎사귀를 낼 때 응원하게 됐고 봉오리를 맺었을 때는 끝까지 피워내게 도와주고 싶고 정말 피어냈을 때는 누구보다 뿌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자면 화초처럼 나 역시도 끊임없이 '새 잎'내기를 주저하지 말아야겠다고 배우곤 한다.




모든 화초들이 그렇듯이 품종에 따라 크기가 크든 작든 저마다의 성장목표를 가지고 있다.

꽃을 피우지 않는 초록이들도 그들만의 목표가 있다. 끊임없이 '새 잎'을 내는 것이다.

새 잎을 내기만 해도 알아서 햇빛을 받아 점점 짙어지는 초록을 발견할 수 있다.




쏟아지는 햇빛샤워를 하는 화초들처럼 우리 모두는 알게 모르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 사랑을 통해 지금까지 숨 쉬며 살고 있다. 그 사랑이 충만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뭔가를 시도하고 싶고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한참 동안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던 '자존감'이라는 단어는 사랑받음에서 시작된 든든한 뿌리 개념이라 언제 들어도 좋다. 그렇게 한동안 뿌리 개념에 집중하다 보니 자신감이라는 다소 작아 보이는 개념에 집중을 못했던 것 같다.

사실 자존감이라는 것도 수많은 자잘한 자신감이 단단한 사암 정도 되는 밀도와 무게를 가졌을 때 자존감의 한 부분처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자신감은 내가 꿈꿨던 오늘의 작은 모래알 만들기 정도면 충분하다.

너무 거창할 필요가 없다.


걸을 때마다 뒤뚱거리고 걸었다면 좀 더 바른 자세로 걷는 것도 충분하다. 식사를 너무 대충 챙겨 먹었다면 잘 챙겨 먹는 것도 하나의 모래알이 될 수 있다. 저마다의 모래알을 떠올려보자.


자신감을 가지라고 할 때 끊임없이 내가 품었던 불만이 있었다. 나는 그만큼 사랑을 못 받았다는 불만이었다.

그만큼 못 받았다고 믿는 불만은 어린 시절 내가 이만큼 성장하기 위해 우선 입고 있어야 할 최소한의 떡잎이다. 떡잎을 지금까지 내가 입었어야 할 사랑의 모두라고 믿는 다면 너무 사랑을 작게 보는 것이다.

눈을 감고도 뜰 수 있는 큰 눈과 바다보다 넓은 가슴으로 느껴보자. 우리는 떡잎을 키울 정도의 사랑으로는 성에 차지 않고 그 정도로는 절대 그 이상으로 자랄 수 없다. 더 크고 담대한 자신을 발견하자. 이미 충만한 사랑을 담고 있는 우리 자신을 발견하자.


지금은 안다. 지금 존재하고 눈 떠 있는 것 자체가 사랑임을 안다. 아니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함을 안다.


  누구나 눈을 뜨기만 한다면 오후 12시의 햇빛의 뜨거운 사랑을 확인할 수 있다. 나의 하루에 단 한 점의 그늘도 허락하지 않는 시점이 반드시 있다. 그때마다 자각해야 한다. 나는 인식했건 인식하지 못했건 무조건적인 사랑을 온전히 받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내가 고개를 돌려 봐야 할 뿐인 것을 말이다.


지난 시간 나의 도전은 성패와 상관없이 이미 색이 바랬다.

예전에 지금보다 더 젊고 자유로웠던 그 시절처럼 도전을 해봐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다.

 스스로에게도 당당하지 않고 남에게 말하기가 부끄럽고  또 가슴에 품었다고 말하기도 머쓱한 수치스러운 다양한 시도들을 많이 해봐야겠다. 시간이 지나고 나면 '부끄럽고 머쓱한 수치스러움'은 거미마저 떠난 거미줄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당신만의  '새 잎', '모래알' 을 응원합니다.

이전 05화 꽃대 자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