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23
이상한 날이다. 밤인 듯 어두웠던 아침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갑자기 내리쬐는 햇빛이 어색한 낮 열두 시 사십구 분. 몰아치던 빗줄기 끝자락엔 결국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 진풍경을 보고 있자니 꼭 나의 하루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느 직종, 어느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든 비슷하게 느끼는 감정이겠지만, 무언가의 프로젝트를 진행한다는 것은 거친 폭풍우를 지나 한줄기 햇빛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과도 같은 느낌이다.
아무래도 요즘의 내가 그렇다. 늘 해오던 새로운 일이 아닌, 익숙하지 않은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수 없이 많은 폭풍우를 만났다. 그것이 업무의 난이도 건 클라이언트의 성향이건 혹은 누군가의 실수나 잘못이든 간에 기획이라는 것은 참 많은 비바람을 맞아야 하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과연 이 길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기에 나는 이토록 손 떨리고 마음 두근거리는 일을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내 삶의 궁극적인 목표는 '행복'인데, 과연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이 일이 그 행복을 찾아가는 올바른 길이긴 한 걸까 스스로에게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오늘은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었는데, 그것이 행복이다. 내가 먹고 싶었던 음식을 그 누구의 반대 없이 오롯이 내 의지로 아주 맛있게 먹는 그 순간이 내겐 삶의 목표를 달성하는 한 순간이 된다.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따위의 고루한 질문은 안중에도 없이 매 순간 내 눈앞에 놓인 상황에서의 행복을 찾는다, 는 이 말을 쓰고 있는 순간조차도 행복을 좇는 내 삶의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 기분이다.
행복이 인생이 목표라는 나는, 웃기게도 내 직업을 타인에게 설명할 때 적잖은 애를 먹는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수단인 돈을 벌기 위한 이 직업을 말이다. 설명하자면 길다. 광고기획자라고 하기엔 내가 기획한 광고가 TV전파를 탄 적이 없고, 프로그램 기획이라고 하기엔 제작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마케터라고 하기엔 내가 기획하는 것들은 무언가를 팔기 위한 것이 아닌 정책이나 제도가 99%를 차지하고, 작가라고 하기엔 시나리오나 대본을 쓰지 않는다. 카피라이터라고 하기엔 문장력이 기깔난 것도 아니고, 홍보기획자라고 하기엔 같거나 높은 비중으로 행사나 방송 같은 업무를 더 많이 한다. 행사나 전시기획자라고 하기엔 실제로 진행하는 컨벤션 관련 업무는 1년에 한두 번 될까 말까 한다. 영업직이라고 하기엔 사무실에서 처리하는 회계 관련 업무들도 꽤나 많고, 반대로 사무직이라고 하기엔 업무를 위한 미팅 일정으로 다이어리가 빼곡하다. 가장 난해한 점은, 지금까지 언급한 이 모든 일들을 한다는 것이다. 직장생활이라는 것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후 3번째 회사인데, 이토록 다양한 업무를 해본 적이 없다. 그저 좋은 아이디어와 올바른 홍보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주 업무였던 나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과연 이런저런 일들을 하고 있는 나는 지금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아니라고 해도 불행하지는 않다. 어쨌든 돈은 벌고 있으니 말이다. 행복을 돈으로 살 수 없다는 말은 요즘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누군가가 말했는데, 그 말이 참 와 닿는다. 요즘의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이 많다. 열심히 땀 흘려 번 돈으로 맛있는 케이크 한 조각, 사랑하는 사람과의 여행 등 내가 행복을 느끼는 그 순간들을 마주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행복을 돈으로 산 셈이다.
물론 이런 행복만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한 삶의 전부는 아니다. 최근에 생긴 한 가지 행복은 나도 드디어 헌혈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사정은 각설하고, 첫 헌혈에 도전했던 23살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지금이 돼서야 진짜 헌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헌혈을 많이 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포상 같은 것이 있는데 (이를테면 메달 같은 상징적인 것들) 그에 따른 포상과 '금장'이라는 명예를 얻는 것이야말로 내가 행복한 것을 넘어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사회적으로 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보이는 행복 중 하나였던 것이다. 물론 금장을 받기까지는 평균 15~20년이 소요된다지만, 그래 봐야 내 나이 40대 중반일 테니 중장기적인 행복 목표로 이만한 것이 또 없는 것이다. 이래저래 평범함 어느 날의 행복에 관한 단상이 헌혈로 마무리 되는구나.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