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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하나코>

많은 이야기들

by 미니고래

2017년 2월 7일부터 19일까지 대학로 공간아울에서 상연중인 연극 <하나코>가 작년에 이어 다시 관객들을 찾아왔다. 이 작품은 민감한 사안 중 하나인 ‘위안부’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주인공 ‘한분이’ 할머니(예수정 분)는 태평양 전쟁 당시 동생과 함께 일본제국에 의해 위안부로 캄보디아에 끌려간 후 살아남은 인물이다. 그런 그녀가 전쟁 중에 헤어진 동생을 찾아 캄보디아에 찾아오는 장면으로부터 이 연극은 시작한다.

우선 작년에 이어 배우와 연출들이 변함없이 다시 돌아온 덕분인지, 올해 공연의 첫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호흡과 연기는 자연스러웠던 점이 눈에 띈다.


대립하는 피해자, 그리고 가해자의 실종


이 연극은 우리에게 피해자로 호명된 한국 사람들과, 캄보디아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독자 또는 관객들은 그들 각자의 욕망과 자본주의적 질서로 인해 인물들이 대립하는 순간을 목격하게 된다.


무대 위에 나타난 한분이 할머니는 방송국 PD ‘홍창현’(신안진 분), 그리고 위안부 문제 관련 활동을 하는 여성학자 ‘서인경’(우미화 분), 통역을 맡은 ‘김아름’(이지혜 분)과 함께 동생을 찾았다는 제보를 확인하기 위해 캄보디아에 왔다. 그리고 캄보디아라는 무대 공간에는 할머니의 동생을 찾았다는 제보를 한 한국인 식당 사장 ‘박재삼’(김귀선 분)이, 한분이 할머니의 동생이라고 주장하는 ‘렌’ 할머니(전국향 분)와 손녀인 ‘메이린’(강다윤 분)과 함께 있다.


연극의 전반부 서사는 렌 할머니가 과연 주인공이 찾는 인물인지를 추적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독자 또는 관객들은 그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분쟁을 목격하게 된다. 어쩌면 이 연극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은 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그 갈등의 순간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원인이어야 하는 가해자 일본제국은 무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그 대신 객체이자 피해자인 그들이 의심과 다툼으로 삐걱대는 주체로서 대립하는 아이러니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연극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싶다. 독자 또는 관객에게 배우의 신체를 통해 실체를 가진 무엇인가를 직접 ‘보여준다’는 그 연극적 힘 말이다.


※ 한국어와 캄보디아어, 그리고 일본어라는 세 가지 언어가 혼재하는 무대는 이 연극을 탈식민주의적 텍스트로 독해하고자 하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어쨌든 이 연극은 일단 표면적으로는 그러한 독해를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캄보디아에 남겨진 ‘렌’ 할머니의 정체성을 밝혀내는 것에는 상대적으로 관심을 적게 기울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무대 위 그 공간이 하필 ‘캄보디아’인가를 한 번쯤은 질문해보아야 할 것 같다. 만약 캄보디아 대신 식민지로서의 한국이, 동시에 제국주의적 가해자이기도 하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바로 옆 나라 ‘베트남’이 선택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아마 이 연극의 서술주체는 물론이고 어쩌면 독자 또는 관객 역시도 다소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았을까?


이야기의 과잉, 설명과 설득의 욕망

연극의 중반부 서사는 한분이 할머니가 찾는 동생의 행방에 대한 비밀이 조금씩 드러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독자 또는 관객은 과거와 현재의 교차를 통해 그 의문을 해소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연극의 후반부의 중요 사건은 한분이 할머니의 진술이다. 그런데 여기에 한 가지 장면이 덧붙여진다. 일단 무대 공간이 일본으로 바뀐다. 그리고 나서 할머니의 기록을 카메라에 담아오던 방송국 PD ‘홍창현’이, 전쟁 당시 군의관이었던 ‘오즈야마’(류용수 분)의 후손인 ‘사사키’(신현종 분)를 찾아가 나누는 대화가 무대 위에 제시된다. 아마 위안부 문제의 또 다른 당사자인 일본인들에 대한 질문과 문제제기를 위해 마련된 것처럼 보인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반부에 이르러 플롯이 다소 늘어지는 느낌을 지우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쩌면 독자 또는 관객에게 무엇인가를 조금 더 설명하고 싶은 서술주체의 욕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욕망의 과잉은 이야기의, 또는 설명의 과잉이라는 결과로 나타난 것처럼 보인다.


‘모큐멘터리Mockumentary’라는 용어가 있다. 이것은 모조품을 뜻하는 Mock라는 단어와 다큐멘터리Documentary의 합성어로, 다큐멘터리의 형식으로 구성하는 허구적 서사를 말한다. ‘페이크 다큐멘터리Fake Documentary’라고도 한다. 연극 <하나코>가 초반과 중반의 플롯이 우리에게 ‘연극만이 가능한’ 무엇을 보여주었다고 한다면, 후반부에 나타난 이 과잉 현상은 연극 전체를 모큐멘터리에 더 가깝도록 가공해버렸다는 느낌을 남기고 만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의 이야기

한분이 할머니가 왜 ‘하나코花子’라는 수십 년 전의 이름으로 이 연극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일까? 어쩌면 지금-여기에서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은 어쩌면 위안부 문제를 과거의 ‘역사적Historical’ 사건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 연극은 그 사건은, 그 문제는 ‘역사적Historical’인 것이 아니라 ‘역사적Historic’인 것이라고 외치는 것처럼 보인다. 전자는 ‘기록된 것’이라는 의미를, 후자는 ‘역사에 남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위안부 문제에 대해 어느 쪽에 더 가깝게 생각하고 있는가? 어쩌면 ‘위안부’ 할머니들을, 혹시라도 우리는 ‘그들’이라는 타자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연 지금 관객 앞에서 살아 숨쉬고 말하며 행동하는 인물은 그저 ‘연극적’ 인물에 불과한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해 반드시 한 번쯤은 제대로 고민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몇 가지 아쉬운 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연극을 보아야 할 이유는 아마 여기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연극 <하나코>가 던지는 독자 또는 관객에게 건넨 그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 말이다.


사진출처: 극단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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