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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니고래 May 01. 2017

[D+28] 리스본, 마지막 하루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비로소 문득 깨달은 질문 - 고래군


 리스본, 이 공간에 나의 경험과 느낌, 의미와 가치의 부여 등이 결합되기 전에는, 리스본Lisboa이라는 명칭은 나에게 그저 책이나 지도, 웹페이지 등에서 만나게 되는 하나의 ‘기호’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스치듯 한 번, 그리고 한 달 남짓 살아보면서 다시 한 번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이제 이 공간은 나에게 하나의 ‘장소place’,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의미와 가치를 지닌 ‘장소’가 되었다.


 몇 년 전 처음 마드리드Madrid를 떠나 리스본Lisboa에 도착했을 때를 다시 떠올려 본다. 산타아폴로니아역Estação Sta. Apolónia에 내려서 알파마Alfama의 구불구불한 골목으로 겁도 없이 무작정 들어섰다가 길을 잃어버렸던 그 날 아침, 시리도록 푸른 하늘 아래 길이 있고 집들이 있었으며 그녀와 내가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의 기억은 나에게 리스본이라는 ‘장소’를 규정하는 의미의 중심핵이 되어버렸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렇게 요약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는 조금 의심이 되기는 하지만 어쨌든, 요약하자면 나에게 리스본은 “푸른 하늘, 그 아래 골목과 건물들, 그리고 사람”인 것이다.


 왜 갑자기 닭살 돋게 진지하냐고? 그 이유는 이제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 되면 나는 이곳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어찌어찌 그라싸Graça에 둥지를 틀고 살기 시작했을 때 느꼈던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정이, 이제는 익숙함 쪽으로 완전히 저울추가 기울었다. 결코 길지 않았지만 그래도 짧지도 않았던 시간 동안 걷고 숨 쉬며 먹고 마신 게 전부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아 잠깐만요. 이제 마지막 날이라고? 진짜? 아니 벌써? 사실 아직 실감이 안 난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나의 길은 이제 여기에서 잠시 끊어져 버리는 것을…….


 한 달이 다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게 되었다. 오늘 하루, ‘나는 이곳 리스본에서 무엇을 가장 하고 싶냐’고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묻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 질문은 사실 첫 날 던졌어야 했던, 그리고 또한 머무는 동안 줄기차게 되물어야 했던 질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은폐되어있는 진실은 결핍을 통해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낸다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이제 내게 남은 날이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가장 중요한 질문을 찾아낸 것이다.


 그래, 지금 너는 이곳 리스본에서 무엇을 가장 하고 싶은 것이냐? 그렇게 스스로에게 비로소 되새긴 질문을 던지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내게 물었다.


“오빠, 오늘 마지막 날인데, 뭐 하고 싶어요?”


 머리에 떠오른 답이 몇 가지 있었다. 리스본의 모습과 사람들의 모습들을 눈에 담기, 그리고 리스본의 공기를 숨 쉬기, 햇살을 피부로 느끼기, 신발 너머로 땅을 밟는 감촉을 느끼기, 그리고 이 도시가 살아 움직이며 내는 소리를 귀로 듣기 등. 


 음…… 하고 말을 흘리는 내가 무슨 말을 꺼낼 틈도 없이 그녀는 곧바로 먼저 자기 생각을 말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이 여러 가지 조항들을 한 단어로 요약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그냥 가까운 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좋을 것 같아.”


그리고 나는 완벽하게 바보처럼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바로 그거였어.”


 라고 말이다.







#2.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 돌아다니기 - 고래군


“현지인의 타임아웃마켓이라고 그러더라.”


 그녀가 문득 이렇게 말한 것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언덕을 걸어 올라가 소방서 앞에 펼쳐진 그라싸 광장Largo da Graça에 도착했을 때였다. 그리고 그 순간은 내일은 여기에 나는 부재할 것이라는 생각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순간이기도 했다.


“우리 지금 가는 거기?”

“응.”

“거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좀 길었는데? 메르까도 캄푸 지 오리크Mercado de Campo de Ourique이네.”

“깜푸죠리크 시장.”


 괜스레 그녀가 말해준 이름을 압축해서 말해보는 나에게, 그녀는 아이폰을 들어 올리며 예전에 검색해 놓은 페이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사실 나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선글라스 너머로도 확연히 보일만큼 강렬한 햇살이 보이는 모든 곳에 쏟아지고 있다. 덕분에 모든 사물은 자신이 낼 수 있는 만큼의 가장 진한 색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때마침 지나가는 28번 트램도 더욱 노랗다. 그리고 그 너머로 보이는, 어제 맥주와 스낵을 샀던 작은 슈퍼마켓 미니프레쏘MiniPreço의 간판도 더욱 선명하게 눈에 담긴다. 심지어 하늘도 여느 때보다 더욱 푸른 것 같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익숙해진 새로운 습관 몇 가지들을 가만히 곱씹어보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 말이다.


“나에게 커피를 먹이지 않으면 포악해질 테다!!”






#3. 마지막이라니, 마지막이라니... - 미니양


 밤비행기를 타고 암스테르담을 거쳐, 꼬질꼬질한 모습으로 리스본에 도착했을 때 한 달동안 뭐하고 지내지? 생각했었는데 마지막 날이 와버렸다. 꽤 많은 것을 하고, 꽤 많은 것을 보고, 꽤 많은 것을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리스본에서의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아쉽기만 하다. 마지막 날이라... 뭘 하면 좋을까 생각하다 우리가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했던 일상같았던 일들을 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테라스로 가 창문을 열고 동네 골목 둘러보기, 날씨랑 하늘 체크하기 그리고 리스본 구석구석 걸어보기, 그리고 느긋하게 여유부려보기...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리스본을 떠나기로 했다. 아파트가 알파마 지구에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맞은 편 구시가지는 많이 가보지 못했으니, 조금이라도 더 구석구석 보자 싶어 현지인의 타임아웃 마켓이라고 하는 시장에 가보기로 했다.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 했지만 자꾸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햇살,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커피, 리스본에서의 마지막 산책......

시장에 도착해서 맛있는 점심이라도 먹어볼까 했지만, 그다지 입맛이 없었다. 눈과 마음 속에 많은 것을 담아보려 열심히 걷고 또 걸었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 햇살이 눈부시게 예뻤던, 카이 소 드레에서 꼬메르시우 광장까지의 길을 걸으며 고래군에게 선언했다.


"나 리스본에서 살거야!!"


아파트를 정리하고 한 달동안의 짐을 정리해서 리스본을 떠나오는 길, 리스본에 남은 미련의 무게만큼 짐과 발걸음은 무거웠다. 이제 정말 떠나야 할 시간.


"Adeus, Lisb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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