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한밤의 여행길 - 고래군
밤 열한 시 사십 분이다. 숫자로는 ‘11:40’ 또는 ‘23:40’이라고 표시하는 시각이기도 하다. 하늘은 캄캄하고, 길에는 인적이 없다. 드문드문 몇 개의 창문에 불이 들어와 있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집들은 아무 빛도 내뱉지 않는다. 리스본은 거의 항상 이렇게 일찍 잠든다. 어쩌면 이 동네 그라싸Graça가 유난히 일찍 잠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뭐 사실 ‘일찍’은 아니겠지 싶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서울처럼 밤에도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도시는 마드리드나 도쿄 등을 빼고는 거의 보지 못했으니까.)
그리고 그녀와 나는 지금 길을 나선다. 그동안 이곳에서 살면서 쌓고 남긴 흔적들을 모조리 가방과 캐리어에 쓸어 담고 말이다. 이렇게 오늘 하루를 이십 분 남겨놓고 길을 나선 것은 비행시각 때문이다. 암스테르담을 거쳐 인천으로 돌아오는 환승편을 타기로 했는데, 일단 리스본에서 떠나는 그 비행기가 아침 첫 비행기라서 이렇게 한밤중에 공항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캐리어의 무게가 심상치 않다. 아니 그런 정도가 아니라, 들고 계단을 내려오는 것만으로 벌써 지쳐버릴 정도이다.
우리의 행색을 간단히 설명하면, 우선 나는 짐을 가득 우겨넣은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하나 끌고 있다. 그녀 역시 백팩을 메고 캐리어를 끌고 있는데, 추가로 에코백 하나를 왼편 어깨에 걸고 있다. 새벽에 나를 먹이겠다고 빵과 치즈, 샐러드, 그리고 물 한 병을 챙겨온 것이다.
비실거리는 나를 보다 못한 그녀가 나와 캐리어를 바꿔서 끌기 시작했다. 자기 백팩이 더 가벼우니까 자기가 무거운 캐리어를 끌겠다고, 그리고 자기 캐리어도 충분히 무겁다고 하면서 말이다. 아 이거 남자가 돼서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어쨌든 간신히 오르막길을 다 오르고 났더니, 그녀는 물론이고 나 역시도 이미 땀을 한가득 흘리고 있다. 공항으로 가는 길은 이제 시작인데 말이다. 돌멩이가 촘촘하게 박힌 길을 이렇게 걷는 것도 이제 마지막이구나. 캐리어가 드드르르륵 소리를 내며 그런 나의 뒤를 따라온다. 사파도레스Sapadores의 버스 정류장 벤치에 그녀와 함께 앉아 가쁜 숨을 내쉬며 땀을 식힌다. 오늘 밤에는 날카롭게 초승달이 떠 있다. 언뜻 보면 마치 월식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보인다.
“힘들다. 많이 덥지? 나 땀 흘린 거 봐요.”
“오빠만큼은 아니지만, 나도 땀 나. 우리 샤워 괜히 하고 나왔나보다.”
나는 그녀가 어깨에 걸고 있는 가방에서 물을 꺼냈다. 에코백 안에 먹을 것들이 한가득 담겨 있어서 그런지 물병도 여기저기 조금씩 찌그러트리면서야 간신히 꺼낼 수 있었다.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미리 나왔더니, 버스가 도착하려면 아직 이십여 분은 더 기다려야 한다. 길 건너편에는 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다. 길 건너 사파도레스 시장Mercado de Sapadores 쪽 길가는 택시 정거장이다. 물론 우리는 한 번도 타본 적은 없다.
시간이 다시 흘러 우리가 기다리던 735번이 왔다. 이걸 타고 알라메다Alameda 지하철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공항으로 가는 것이다. 버스에 올라타, 캐리어를 옆에 세우고 자리에 앉았다. 문득 그 무게가 이 동네에 남겨두고 가는 아쉬움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리스본을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의 무게, 그리고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소망의 무게 같기도 하다.
#2. 발사믹 사태 - 고래군
우리가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곳에 거의 다 왔다. 알라메다 지하철역은 동쪽과 서쪽으로 길게 생긴 공원, 아폰소 왕의 알라메다 공원Jardim da Alameda Dom Afonso Henriques이라는 이름만큼이나 길쭉한 모양의 공원의 중간 지점 즈음에 있다. 날씨가 화창한 날에는 담요를 깔고 뒹굴거리는 사람들, 그리고 뛰어다니는 아이들과 가족들이 모여드는 아름다운 공원이다. 하지만 지금은 캄캄한 밤이다. 버스 창문 너머로 어둠 속에서 지하철역 표지판이 뿌연 빛을 내뿜으며 쓸쓸하게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나저나 어디서 계속 시큼한 냄새가 난다?”
“오빠, 우리 짐 많으니까 조금 일찍 일어나서 내릴 준비 하자.”
그녀의 말을 듣고 가방을 고쳐 메고, 캐리어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마찬가지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의 발치에서, 나는 검붉은 액체가 조금 고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흘린 피처럼 검붉은…….
놀란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그거 뭐야!! 당신 발치에 그거 뭐야!”
“뭐가? 왜왜!”
“어어. 피처럼 붉은… 그런데 그거 우리 도시락 가방에서 떨어지는 거다!”
순간 그녀가 기겁을 하면서 소리쳤다.
“오빠 너 아까 물 꺼내면서 샐러드 통 헤집었어? 발사믹 식초 샜나 보다!”
아까부터 버스 안에 흐르던 시큼한 냄새,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그 향기가 바로 이것이었나 보다. 까만 천으로 된 가방 아래를 흠뻑 적시고, 그것도 모자라 버스 바닥에 방울방울 흘러내린 발사믹 식초의 상큼한 향기 말이다. 그 향기는 덩달아 그녀의 외투에도 깊게 배었다. 그녀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일단 내려! 내려서 정리하자.”
“우리 떠나지 말라고 리스본이 골탕 먹이나 봐…….”
“일단 얼른 내리라고! 공항 안 갈 거야?”
아… 그녀가 화가 나 버렸다.
#3. 공항으로의 험난한 여정 - 미니양
외투에서는 발사믹 식초 냄새가 나고, 짐은 무겁고, 당장이라도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비행기는 타러가야 했으니, 우선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지하철역으로 들어갔다. 공항에 가기 위해 돈을 남겨둔 재핑카드를 개찰구에 찍었는데... 찍히지가 않는다.
버스나 트램은 처음 재핑카드를 찍고 1시간 내에 다시 타면 환승이 되는데, 버스에서 지하철로는 환승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리스본에서 오래 머무는 여행자가 거의 없다보니, 그런 정보들을 알려주는 곳이 없어 한 달동안 몸소 체험(?)하며 다녔는데, 버스-지하철 간의 환승체험은 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당연히 환승이 될 줄 알았던 우리는 당황스러울 수 밖에 없었다.
남은 유로는 없었기 때문에 ATM 기계를 찾아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하나 당황하고 있었는데, 지하철 티켓 머신을 보니 카드로 결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결국 신용카드로 1.90유로씩 결제를 하고 공항으로 갈 수 있었다. 리스본은 우리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고, 나 역시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떠날 수 밖에 없어 아쉬웠다. 사랑하지만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연인의 간절한 마음 같다고나 할까?
하지만 다시 올 리스본이니까 괜찮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