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리스본, 오늘은 맑음 - 고래군
오랜만에 모처럼 깊고 깊은 푸른색 하늘을 만나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비가 내리고 흐린 것은 며칠 안 되었던 것이 사실인데, ‘오랜만에 모처럼’이라고 느끼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에게 있어 이 도시의 날씨는 ‘언제나 맑음’이라는 선입견이 생겼나보다. 어쨌든 오늘은 드디어 파랗게 맑은 하늘 아래 리스본을 걸어 다닐 수 있을 것 같다.
피게이라 광장Praça da Figueira에서 714번 버스(Autocarro 714)를 탔다. 이 버스 노선은 15번 트램(15E, 리스본의 대중교통 번호 옆에 붙은 E는 Elétrico의 약자이다.)과는 다르게 테주강변의 남쪽 도로 바로 안쪽 주택가를 따라 서쪽으로 달린다. 덕분에 이동하는 데 시간은 제법 더 걸리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15번 트램보다 덜 알려져 있는 모양인지 승객은 훨씬 적은 편이다. 게다가 호시우Rossio를 중심으로 하는 관광지역과 벨렝Belém을 중심으로 하는 관광지역이라는 두 개의 섬 사이에 있는 수면 아래 감춰진 공간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기도 한다. 사실 나는 유명한 관광지나 랜드마크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는 공간과 서사에 더 관심이 있는 편이다.
우리가 오늘 향하는 곳은 Lx팩토리(LxFactory)이다. 원래는 그저께 MAAT와 함께 묶어서 가볼 생각이었는데, 다들 알다시피 그 날은 폭풍처럼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오늘 가게 된 것이다. 오늘은 내가 벨렝까지 안 갈 거니까, 비도 안 올 거다. 안 간다 안 가 벨렝.
#2.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 미니양
리스본에서 요즘 핫하다는 LX팩토리. 사진들을 보다가 책이 천장까지 가득 꽂혀있었던 서점의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포르투갈 디자인은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공장이었던 곳을 개조해서 아티스트의 샵들이 모아놓은 곳이었다.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이런 곳은 그냥 지날칠 수 없어 고래군과 이 곳을 찾았다. 고래군은 나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디자인 관련 장소에 많이 방문하다보니, 이제는 길가다가 깨지거나 왜곡된 이미지들을 보면 훈수를 두기도 한다.
버스를 타고 4월 25일 다리 근처에서 내려 LX팩토리를 찾았다. 인터넷으로 봤더 서점에 들러 한참동안 책을 봤다. 그 중에서 포르투갈 동화책들이 너무 예뻐서 한참을 그 앞에 서성거렸다. 읽지도 못하는 동화책 몇 권을 들었다놨다 하다 조용히 내려놨다. 이미 책은 2권이나 샀으니, 다음 번에 포르투갈어를 좀 배워서 사자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서점은 여느 서점처럼 빼곡히 책이 꽂혀있었지만, 그 옆에는 레스토랑이 붙어있었고, 공장에서 쓰던 기계도 그대로 있었다. 2층에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을 수도 있었고, 레트로 느낌이 물씬나는 소품들도 판매하고 있었다. 한참을 서점에서 방황하다 밖으로 나와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으며 여러 가게들을 돌아봤다.
LX팩토리에는 공장의 모습과 아티스트들의 그림, 제품들로 매력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한가롭게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사람들, 노트북으로 뭔가 작업하는 사람, 애정어린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커플까지. 매력적인 분위기에 사람들까지 더해져 더 멋진 풍경을 만들었다. 게다가 날씨까지 맑으니, 어찌 좋지 않을 수 있을까? 사람과 자연, 사람이 만든 건축물이 잘 어우러진 곳이었다.
#3. 공간 조각 모음- 고래군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리스본의 어디에 있든지 간에, 테주 강Rio Tejo의 방향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게 된 것이 말이다. 아무래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본 지도가 어느 새 각인된 모양이다. 오후 두 시. 햇살이 가장 따가운 시각이다. 그리고 마침 여행 중 리스본에 찾아온 그녀의 후배를 호시우 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 오후 다섯 시이다.
Lx 팩토리에서 나온 우리는, 그래서 버스를 타고 달려왔던 그 길을 따라 무작정 동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며칠 동안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제대로 걷지 못해서 그런지, 다리는 더 많이 길을 밟기를 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햇살 사이로 길을 걷다가, 문득 버스가 다니는 길보다 더 안쪽으로도 길이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길은 이윽고 남쪽과 북쪽으로 갈라지면서, 더 이상 동쪽으로 갈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어떤 길에서는 작은 벤치를 만나, 가방에 챙겨온 빵과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쉬어가기도 했다. 어제 인텐덴테Intendente 지하철 역 근처에 있는 리들Lidl에서 산 오렌지 주스 한 병과 빵 몇 조각을 가방에 챙겨왔는데, 이제 다 먹고 마셔버리는 바람에 백팩도 더 가벼워졌다.
“이 동네 이름이 라파Lapa인가봐. 아까 그 동네는 이름이 알칸타라Alcântara인 것 같았는데. 그런 이름 가진 축구선수도 있거든.”
“으이그. 축덕….”
“나 축덕 아니래도!! 그나저나 이 동네 조용하고 좋네.”
우리가 만난 그 동네는 결코 크고 화려하다고는 할 수 없는, 조용하고 소박한 집들이 모여 있는 동네였다. 보통은 ‘주택가’라고 하던가? 맞은편에서 할머니의 손을 붙들고 집으로 향하는 것처럼 보이는 서너 살 꼬마 아이가 우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특히 그녀가 참 마음에 들었나보다. 신기하게도 그녀는 그 나이 정도 되는 아이들에게 정말 인기가 많다. 국적과 인종, 성별을 불문하고 말이다.
한동안 조용한 골목들을 따라 구불구불 동쪽으로 향한 우리의 걸음은 계속 이어졌다. 아마 이제 곧 바이루 알투Bairro Alto 동네인가보다. 문득 그녀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빠, 나중에 우리 여기 와서 살자.
#4. 그라싸 전망대에서 맛있는 저녁 - 미니양
리스본에 머무는 동안 전망대에서 맥주 한 잔을 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전망대는 아파트에서 5분만 걸어가면 되는 곳이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저녁에 아파트에 돌아와서 개운하게 씻고 마시는 술 한 잔의 달콤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늘은 밖에서 간단하게 맥주 한 잔을 하기로 하고 전망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전망대에 일몰을 보러 갔다가, 장을 보다 산 맥주를 꺼내 홀짝거리다 보니, 그대로 주저앉게 되었다.
"오빠! 우리 왜 여기에서 맥주 마실 생각을 못했을까?"
"매일 집에서 술 마시기에 바빴으니까."
"여기 이렇게 좋은데......"
"그러게."
"오빠! 우리 이제 곧 한국에 돌아간다. 아쉬워."
"그러게. 나도 아쉬워."
"돌아가기 싫어! 나... 여기에서 살고 싶어."
"다음에 꼭 다시 오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느새 어두워졌고 가방에 있는 맥주를 다 비우고나서야 우리는 전망대 난간에서 내려왔다. 우리의 대화도, 맥주도, 분위기도 맛있었던 저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