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에서 한 달 살아보기
#1. 잿빛이 스며든 하루 - 고래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커피머신에 커피를 털어 넣으며 오늘을 시작한다. 그라싸 길Rua da Graça에 있는 포르텔라 카페Portela Cafés에서 사온 커피가루 한 봉지를 사다 마셨는데, 이번이 남은 커피의 마지막이다. 이걸 마시고 나면 새로 한 봉지 사야 한다. 커피머신이 내는 물 떨어지는 소리를 타고 커피향기가 거실에 퍼지기 시작한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하염없이 두드린다. 일기예보는 늦은 오후에는 비가 그칠 것이라고 추측하기는 한다. 하지만 봄날의 일기예보라는 것이 변덕스럽게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니, 그다지 기대하지는 말아야 할 것 같다. 빗줄기에 아무래도 오늘 하루는 집에서 하염없이 머물게 될 것 같다. 컵에 커피를 반 정도 채워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빗방울이 유리창에 부딪혀 흘러내리는 소리가 커피 향기에 실려 거실에 퍼지는 것을 바라본다.
툭 툭 툭 툭
오후 세 시가 되어서야 빗방울이 가늘어지기 시작했다. 혹시 저녁 햇살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길다란 창문을 열고 발코니 너머로 손을 내밀어 보았다. 금세 손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곳에 머물기 시작한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되어 간다. 그 말은 이제 리스본에서 머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어쩌면 길게 느껴질 수도 있을 시간인 한 달. 그러나 살아내고 나서 뒤돌아보면 찰나에 불과한 시간, 한 달. 마치 지금 내 손을 적시는 이 빗방울의 온도를 느낄 수 있는 순간처럼 짧은 시간, 한 달……. 이런 생각이 드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하늘의 잿빛이 내 안으로 스며들었나보다.
#2. 비오는 날, 잡다한 생각들 - 미니양
3주를 넘게 리스본에 머물면서 비가 이렇게 쏟아지는 날은 처음이었다. 벨렘에 갔던 날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비가 많이 왔다. 마치 여름날의 장마처럼 하루종일 내리는 비를 그저 창문으로 바라만 봤다. 어제 축구를 보고 힘겨운 귀가를 한 덕분에 밖으로 나갈 생각 같은 건 애저녁에 사라졌고, 아파트에서 그냥 냉장고나 파먹으며 있을 생각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 냉장고를 열어 있는 재료들을 꺼냈다.
빵, 달걀, 햄, 오렌지, 치즈와 요거트까지. 꽤나 많은 재료들로 풍성한 아침 식사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따뜻한 커피 한 잔까지. 풍성하게 아침을 먹고, 점심, 저녁도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나름 맛있게 차려먹을 수 있었다. 밖에 하루쯤 나가지 않아도 하루종일 먹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의 냉장고는 부자였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소에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사는 듯하다. 사실 한 달을 떠나오면서 우리에게 필요했던 것은 24인치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가 전부였다. 돌아갈 때의 짐을 위해 20인치 캐리어도 가지고 왔으나, 사실 옷 몇 벌과 세면도구 그리고 여권과 돈만 있으면 생활하는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아파트에 기본적으로 있었던 가전제품과 도구로도 부족하지만 충분히 살만 했다. 하지만 평소에는 조금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조금 더 예쁜 옷을 입기 위해, 조금 더 편리한 생활을 위해 무언가를 계속 채워가며 살아간다. 비워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쯤은 머리로는 알고 있으나, 실제로 실천하기란 쉽지가 않은 것 같다. 지금도 한국에 돌아가면 비우면서 살아야겠다 생각하지만, 실천하고 살 수 있을까 의문이 들기도 한다.
여행하는 것처럼 일상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라고 항상 생각하지만, 여행=일상이 되는 순간 여행의 매력도 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비가 오니,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들이 떠오른다. 그저 주저리 주저리 주절거려본다.